핏빛 혁명 성지에 보라색향기 '라벤더'
전북 고창 청농원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는 해마다 6월이면 많은 관광객이 몰린다. 휴가철도 아닌 시기에 거기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정답은 라벤더다. 6월 프로방스는 그야말로 라벤더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최근 들어 라벤더를 관광자원으로 키우는 곳이 늘어났다. 전북 고창의 청농원도 그런 곳 중 하나다.
19세기 말 동학혁명 봉기 장소였던 고창 공음면
민란 이끈 배환정 기려 손자가 제각 ‘술암재’ 건립
2019년 체험농장 열고 지난해 라벤더 정원 개장
낮은 언덕에 색색의 금계국·수레국화·라벤더 지천
6월 중순 만개하면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분위기
■청농원
우리나라의 대부분 시골마을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논밭과 주택이라는 모양으로 이뤄졌다. 어딜 가더라도 산을 볼 수 없는 곳은 드물다. 그런데 고창군 일대의 지형은 꽤 특이하다. 주변에 높은 산은 찾아보기 힘들다. 곳곳에 아주 낮은 언덕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야말로 남유럽 같은 분위기다.
전북 고창군 공음면 청천길(용수리)에 자리를 잡은 청농원도 마찬가지다. 언덕과 그 사이의 논밭, 그리고 다시 언덕과 그 사이의 논밭이 이어진다. 청농원으로 가는 도로 주변의 논에서는 노랗게 잘 익은 보리가 바람에 흔들린다. 보리를 벤 곳도 있고 아직 그대로 놔둔 곳도 있다. 보리가 자라는 곳도 경사도가 낮은 언덕이다. 이렇게 부드러운 지형에서 살면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이렇게 평온한 동네에서 사는 순박한 사람들이 왜 분노한 것일까. 뜻밖에도 공음면은 19세기 말 동학혁명 봉기 장소였다. 이곳에 살던 배환정이 전봉준 등과 뜻을 모아 민란을 일으켰다. 청농원 주위에는 대나무 숲이 있다. 동학혁명 때 농민들은 이 숲의 대나무를 베어 무기로 사용했다.
청농원이 변한 것은 20세기 들어서였다. 1943년 배환정의 손자인 배종혁은 조부를 기리는 뜻에서 제각인 술암재를 지었다. 달성 배씨의 살림집과 농장으로만 사용되던 청농원은 2019년 체험농장으로 바뀌었다. 2020년에는 핑크뮬리 정원이, 지난해에는 라벤더 정원이 개장했다.
먼 길을 마다 않고 달려온 여행객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청농원 언덕 모퉁이를 완전히 뒤덮은 황금색 금계국이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노란 꽃 사이로 하얀 나비가 날개를 펄렁인다. 금계국 뒤에는 배종혁이 건설한 술암재가 서 있다. 노란 꽃과 검은 지붕, 하얀 벽을 가진 기와집.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술암재를 배경으로 금계국을 찍다 몸을 반대로 돌린다. 보라색 수레국화가 등 뒤에서 금계국과 어울려 장난을 친다. 따뜻하거나 시원한 차,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카페 청’은 팔짱을 끼고 문을 열어젖힌 채 꽃들의 놀이를 보며 웃는다.
술암재와 금계국을 지나 언덕 위로 올라간다. 라벤더 정원은 술암제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꽃은 제법 많이 피었지만 아직 완벽하게 개화한 상태는 아니다. 봉오리만 살짝 맺히고 활짝 피지 않은 게 대다수다. 색도 짙은 보라색이 아니다. 약간 연하게 보라색 느낌만 줄 뿐이다. 6월 중순은 돼야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환상적인 사진을 찍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가까이 다가가서 근접 촬영을 하면 된다. 많은 보라색 라벤더 꽃을 중심으로 삼아 뒤쪽의 푸른 산과 노란 금계국, 그리고 곳곳을 돌아다니는 관광객을 찍으면 된다.
보라색은 매우 독특한 색이다. 옛날부터 왕족을 상징하는 고귀한 색으로 여겨졌다. 고대 로마에서는 집정관, 군대의 사령관 등만 보라색 옷을 입었다. 올해 즉위 70주년을 맞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가장 즐겨 입는 옷도 보라색이다.
라벤더 정원의 둔덕에 앉으면 눈높이에서 라벤더 꽃을 볼 수 있다. 정원 아래로는 나지막한 언덕이 흘러 다니는 공음면이 펼쳐진다. 시원한 바람에 얹혀 라벤더 꽃이 살랑살랑 고개를 흔든다. 관람객 옆으로 아주 연한 향기를 살그머니 퍼뜨린다. 하얀 나비 두 마리가 꽃 사이를 날아다닌다. 사진에 담으려고 애를 써보지만 나비는 좀체 기회를 주지 않는다.
라벤더 정원 안팎에는 별다른 시설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언덕 위쪽과 아래쪽에 하나씩 보라색 그네가 설치됐고, 중간 지점에 아주 작은 나무 의자 두 개가 놓인 게 전부다. 괜히 이것저것 가져다놓는 것보다는 깔끔하게 꽃만 보는 게 오히려 더 낫다. 보라색 그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도 꽤 좋은 장면이 나온다. 꽃이 만개했을 때에는 그네를 탄 장면을 찍어도 괜찮을 듯하다.
■주변 관광지
청농원에서 30분 거리에는 숲이 아름다워 30~40분 정도 산책하기에 좋은 고창읍성이 있다. 봄에는 벚꽃, 여름엔 철쭉,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노송의 설경이 멋진 곳이다.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한다는 전설이 전하는 장소다.
비슷한 거리에 선운사도 있다. ‘구름 속에서 참선 수도해 큰 뜻을 깨친다’는 뜻인 ‘참선와운(參禪臥雲)’에서 절의 이름을 따왔다. 천왕문까지 약 1㎞의 진입로 전나무 숲속을 걷는 기분은 가본 사람만 안다.
역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하전 갯벌마을도 인기 관광지다. ‘맛과 멋의 보물창고’라는 고창갯벌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바지락을 캐보는 것은 물론 바지락으로 만든 음식도 맛볼 수 있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