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코리안 디아스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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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해(본명 송복희) 선생은 실향민이다. 6·25 전쟁 이듬해 쌀과 풍광으로 유명한 황해도 재령에서 연평도를 거쳐 미군 군함과 화물선을 옮겨 타고 홀로 부산으로 월남했다. 피란 이후 4년여 동안 영화 ‘국제시장’의 주무대인 부산극장 등 부산 중구 남포동·광복동 일대에서 어렵게 살았던 그는 자신을 품어 줬던 부산을 ‘제2의 고향’으로 여겼다. “시간만 나면 부산 친구들과 어울려 논다”면서 “태종대를 제일 좋아한다”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1·4후퇴 직전 “어머니 걱정 마세요. 이틀 뒤에 옵니다”라며 남쪽 연평도로 피신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이번엔 조심해라!”라고 거듭 당부했었다.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 ‘송해 1927’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아 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고향 어머니와의 마지막 순간을 그렇게 눈물로 기억했다. 애끊는 그리움을 담아 송해는 2015년 노래 ‘유랑청춘’에서 “눈물 어린 툇마루에 손 흔들던 어머니/ 길 떠나는 우리 아들 조심하거라/ 그 소리 아득하니 벌써 70년/ 보고 싶고, 보고 싶은 우리 어머니…”라고 목 놓아 불렀다.

환갑을 넘긴 1988년부터 KBS ‘전국노래자랑’의 마이크를 잡아 일요일 낮마다 전 국민을 울고 웃겼다. 시청자들은 ‘일요일의 남자’인 그의 “전구우욱~” 구호에 맞춰 “노래자랑”이라 화답하면서 “빠라밤 빠라밤 빠라밤빰 빰빰 빰빰~”을 흥얼거렸다. 지난 34년간 사람들의 열정과 끼, 정겨운 사투리와 함께 ‘딩동댕, 땡’ 소리가 울렸던 무대는 언제나 유쾌함과 위로가 있었다. 하지만, 무대 이면은 달랐다. 전쟁으로 인한 실향의 고통, 아들과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고독함 등 삶의 그림자가 진하게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송해는 “인생은 딩동댕도 있고, 땡도 있다. 땡을 받아 보지 못하면 딩동댕의 뜻을 모른다”면서 “괜찮아 이만하면 괜찮아 내 인생 딩동댕이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이자, 한국 대중문화의 거인이었던 송해가 8일 향년 9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와 함께 6·25전쟁과 피란으로 뿌리 뽑힌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던 세대의 시대도 저물어 간다. “고향 땅 한번 밟아 보는 게 꿈”이라던 송해 선생이 하늘나라에서나마 ‘전국노래자랑 황해도 재령편’을 진행해서 “전구우욱~~~노래자랑!”을 외치기를 기원한다. 그 무대 위에서 어머니 고운 손을 부여잡고 “어머니! 복희 저 잘 살았죠”라고 꼭 물어보시기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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