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사랑과 연민, 혐오의 시대를 건너는 길
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넘을 듯 말 듯 하지만 말과 행동으로는 쉽게 선을 넘지 않는다. 냄새가 문제다. 반지하에 사는 김 기사(송강호)의 몸에는 독특한 냄새가 배어 있다. 오래된 무말랭이 냄새랄까 행주 삶을 때 나는 냄새일까. 박 사장(이선균)은 김기사에게서 풍기는 냄새가 자못 불쾌하다. 혐오감을 유발한다. ‘기생충’에서 불쾌한 냄새라는 장치는 계급을 분할하는 표지이자 혐오의 대상이다. 혐오는 동물성을 상기하거나 육체적 측면과 연관하여 유발되는 경향이 짙다. 냄새나 배설물, 체액을 접할 때 느끼는 즉각적인 거부감이다. 우리가 동물이거나 육체에 봉인된 저열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강력한 회피 기제가 바로 혐오다. 문제는 이러한 혐오감을 특정한 집단에 투사한다는 데 있다. 지배집단은 인종과 성, 종교, 계급, 세대, 지역을 기준으로 다른 집단에 혐오적 속성을 덧씌우고 그들을 동물적 존재로 끌어내린다. 과거에는 식당과 화장실, 교통수단 등의 생활세계에서 이들과 공간의 분리를 시도하기도 했다. 선을 넘지 않도록 말이다.
혐오가 초래한 비극은 역사적으로도 연원이 꽤 깊다. 근대 들어 인종과 민족, 이념과 종교의 차이로 자행한 제노사이드는 혐오에 기반한 광기의 역사다.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다룬 ‘쇼아’와 ‘쉰들러 리스트’, 르완다 대학살을 담은 ‘호텔 르완다’와 ‘4월의 어느 날’은 이러한 광기를 잘 드러낸 영화다. “투치족은 바퀴벌레다. 후투족이여, 일어나라!”는 선동은 다른 부족을 비인간화하며 집단적 광기를 정당화한다. 혐오가 이성을 완전히 무력화한 역사적 경험은 이토록 무겁다. 동서를 막론하고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는 사회적 금기로 견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럼에도 최근 혐오를 표출하는 일이 잦다. 혐오의 일상화에 더하여 날로 과격해지고 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타고 확산하는 혐오의 표현은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
우리 사회의 편가르기에도 혐오가 작동한다. 선동적 구호의 ‘투치족’과 ‘후투족’ 대신 이대남과 이대녀, 보수와 진보, 내국인과 외국인을 대입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음울한 초상이기도 하다. 혐오는 더 이상 소수자나 특정 집단만을 겨냥하지 않는다. 빈약한 공정성의 논리를 앞세운 혐오의 정치는 민주주의가 어렵게 구축한 호혜의 가치를 단숨에 무너뜨린다. 혐오를 방치해서는 안 되는 근본적인 이유다. 혐오와 분노는 어떤 표적을 겨냥한 감정이지만 완전히 다르다. 분노가 부당한 행위나 피해에 대한 감정이라면, 혐오는 누군가가 지닌 영구적 특성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다. 증오와 차별의 책임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혐오는 차라리 망상에 가깝다.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의 말처럼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은 보복과 증오가 아니라 사랑과 연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