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한·일 관계 '훈풍' 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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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 국제 정세, 양국 안보·경제 ‘전략적 협력’ 필요

지난 11일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제19차 아시아안보회의에 참가한 한·미·일 3개국 국방장관(사진 왼쪽). 북핵 실험을 앞두고 지난달 24일 여러 대의 공군 전투기가 최대 무장을 장착하고 활주로에서 밀집 대형으로 이륙 직전 단계까지 지상 활주를 하는 ‘엘리펀트 워크(Elephant Walk)’ 훈련 장면. 연합뉴스

“중요한 것은 양국의 미래 이익이고, 미래 세대가 지향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를 중점에 두고 생각하며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만들겠다.”(윤석열 대통령)

“한·일 관계 개선은 더 이상 기다리기 어려운 시급한 현안이다.”(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1965년 국교 정상화 이래 최악의 수준으로 악화되면서 양국 정부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하지만, 북한 핵실험, 미·중 전략 경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등 급변하는 신냉전의 국제 정세에서 안보 문제가 한·일 협력의 돌파구로 급부상하고 있다. 문화·관광 교류도 숨통을 틔우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2년 3개월 동안 막혔던 한·일 관광 교류가 재개되면서 도쿄 한국대사관에는 비자 신청을 위한 밤샘 줄이 이어질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오는 29∼30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첫 만남이 이뤄질지 주목받고 있다. 과연 얼어붙은 한·일해협에 훈풍이 불 수 있을까?



북핵이 한·일 안보 협력 자극

한·일 관계 정상화 의지를 보이는 윤석열 정부가 대화 의향을 먼저 내보인 분야는 국방이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과 7차 핵실험 준비에 대응한 한·미·일 3국의 공조가 제대로 작동할지 여부가 국방 분야 협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14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의 정상화 문제와 관련 일본 등 국제사회와 소통 노력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박진 외교부 장관도 13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의 회담에서 한·미·일 협력과 한·일 양국 관계 개선 및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정상화 등 한·일 군사 협력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일 안보 협력 강화 기조 아래 지소미아 정상화를 위한 논의가 조기에 시작되는 것이라는 관측이다.

과거사 문제가 국내 정치 문제로 비화하면서 한·일 간 안보 협력을 강화하는 국민적 합의를 얻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북핵이란 당면한 위협, 인도·태평양지역에서 미·중·러로 이어지는 신냉전이 오히려 한·미·일 3국의 군사·안보 협력을 가속화하는 상황이다. 북핵 정보 공유, 공동 감시·정보 태세 구축, 정책 공조 등으로 시작하는 3국 안보 협력 체제를 통해 신뢰를 쌓은 뒤 포괄적인 협력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전망이다.

“한·미·일 연계가 지금처럼 중요한 때가 없었다”는 기시다 총리의 말대로 인도·태평양 지역 안보를 위한 한·일 관계 개선은 미국의 전략과도 일치한다. 미국 국무부 마크 램버트 부차관보는 최근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대담에서 “분명한 것은 한국과 일본이 협력하지 않는다면 한·미·일 모두 덜 안전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현실에 대해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은 15일 부산의 한 조찬 포럼에서 “UN안보리의 의미가 사라진 신냉전 시대, 동맹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면서 “인도·태평양 지역의 핵심 축인 한국과 일본의 관계 개선은 사실상 완성 상태인 북핵 대응과 함께 미국 중심의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 강화를 위해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밝혔다.



국내 정치에 악용되는 나쁜 학습 효과

정치 스케줄도 양국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일본은 오는 22일 참의원 선거가 공시되면 선거 정국으로 돌입한다. 다음 달 중순 치러지는 참의원 선거 이후, 일본은 3년간 선거가 없다. 코로나19 사태에서도 60%대의 지지율을 유지하는 기시다 총리는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을 차지할 경우 아베 전 총리와 비교적 다른 온건파 목소리를 낼 수 있다. 6·1 지방선거를 끝낸 한국도 2024년 총선까지 2년간 선거가 없다. 양국 정상이 한·일 관계 개선을 논의할 수 있는 정치적 시간을 벌 수 있다. 이에 따라 양국 정상회담도 일본 참의원 선거가 끝난 후, 정치 상황이 안정된 상태에서 이뤄질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물론 ‘한 치 앞은 암흑’이라는 일본 정치 용어처럼 참의원 선거의 어떠한 결론도 예단하기는 쉽지 않다. 자칫 자민당이 패하는 경우 전혀 의외의 결과도 초래할 수 있다. 또한, "털끝만치도 반성하지 않겠다"(아베), "한국과 올림픽 정상회담 거부하겠다"(스가), "다시는 지지 않겠다"(문재인) 등 갈등을 증폭시켜 국내 정치용으로 악용한 ‘나쁜 학습 효과’로 인해 한·일 모두 타협하기도 쉽지 않은 현실이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내세우는 윤석열 정부 입장에서는 야당에서 반일 감정과 배타적 민족주의 정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정권마저 휘둘릴 위험성도 높은 실정이다.



과거사 문제는 장기적으로 관리해야

교과서 역사 왜곡부터 독도·징용·위안부 문제 등이 단기간에 완전 해결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재 갈등의 핵심인 강제징용 및 자산 현금화 문제는 가장 해결하기 어렵지만, 동시에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강제징용 판결에 의한 현금화 조치가 이루어질 경우, 일본의 보복과 한국의 반발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폭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는 반일 감정에 기름을 부어 일본 제품 불매 운동, 일본 관광 보이콧, 지소미아 종료 통보 등으로 격화됐다. 한국의 경제적·군사적 피해는 크지 않지만, 양국 관계는 수교 이래 최악의 상황이다.

일본 관계 전문가인 동서대 장제국 총장은 “윤석열 정부 취임 이후 양국은 현안에 대해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정도”라면서 “협상의 실마리는 결국 해결책에 대한 한국 내의 국민적 공감대 형성 여부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신뢰 회복 문제로 귀결된다”고 지적했다. 국내에서 과거사 문제에 대해 어떤 수준으로 해결하는지에 대해 합의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의미이다.



포괄적 해결이 아닌 단계적 협력으로

무엇보다 11년째 중단된 정상 간 상호 방문에 의한 조속한 정상회담 개최가 중요하다. 톱다운 방식을 통해 물꼬를 튼 뒤, 문제를 단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한·일 간의 소통을 강조하며 2004년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에 의해 처음으로 합의된 ‘셔틀 외교’의 복원도 바람직하다. 기회 있을 때마다 한·일 정상이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다는 신호를 주는 것만으로도 한·일 관계에 훈풍이 불 수 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응한다는 명분 아래, 하루빨리 정상회담을 통해 수출 규제 해제, 지소미아 복원 등도 마무리해야 한다.

하지만, 한번에 밀어붙이기식 해결은 어렵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직전 아이보시 고이치 주한 일본대사를 만나 “양국의 정치 지도자와 관료, 국민이 강력한 힘으로 한·일 양국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밀어붙이면 다른 문제들이 대화를 통해서 잘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한·일 관계 개선의 의지 표명은 좋지만, 역사 문제 해결과 국가 간 화해는 한 정권에서 일괄 타결하거나 청산할 사안이 아니다. 국내 합의를 무시하고 서두르다 역풍을 맞은 이전 정권의 실패를 되풀이하기보다는 갈등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논의해야 한다.

세종연구소 진창수 일본연구센터장은 ‘윤석열 정부의 대일 정책 과제’ 전략 보고서에서 “한·일 양국이 윈윈하기 위해서는 양국 정치권이 배타적 민족주의 정서에서 벗어나 과거사 문제 해결은 장기적인 갈등 관리에 역점을 둬야 한다”면서 “경제에서는 이익을 증진시키고, 북핵 대응에서는 전략적 협력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한·일 간의 안보 협력과 나토 정상회담을 앞두고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 역량이 시험대에 올랐다. 어떤 형태로든 새 정부가 최악의 한·일 관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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