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정은혜의 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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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 하나로, 대사 한마디로, 삶을 위안하고 농락했다가 다시 보듬는… 진짜 배우들의 진정한 연기를 볼 장이 없어지고 있다.”(노희경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중에서)

아름다운 바다 제주 푸릉마을과 제주오일장을 배경으로 평범한 인간들의 지지고 볶는 삶을 옴니버스 형태로 풀어낸 주말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가 지난 12일 시청률 18%로 종영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쉽게 상처받고, 또 위로받고 싶어 하는 존재인지를 새삼 깨닫게 한 ‘우리들의 블루스’는 김혜자, 고두심, 신민아, 한지민, 이병헌 등 톱스타들이 총출동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더 큰 인상을 남긴 것은 다운증후군을 가진 장애인 배우가 장애인 역을 직접 맡은 첫 번째 드라마라는 점이다. 주연을 맡은 배우 정은혜는 틱, 조현증 등으로 고통에 시달리다 우연히 그림을 시작하면서 작가로서 삶의 전환점을 맞았다고 한다.

드라마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장애인과 그 가족이 겪는 삶과 차별, 상처를 담담하게 보여 준다. 다운증후군을 앓는 쌍둥이 언니로 출연한 영희(정은혜)는 2년 만에 제주에서 만난 동생 영옥(한지민)에게 오래전 일을 회상하며 “너! 나 지하철에 버렸지! 나쁜 년”이라고 욕하면서도 동생을 그리워한다. 동생은 언니가 직접 그린 자신의 그림에 ‘영희, 영옥 서로 사랑하다’란 글을 보고 오열한다. 왜 우리가 사랑하고, 만나고, 화해하기 위해 발버둥치는지를 깨닫는 가슴 뭉클한 순간이다. 서로 조금의 차이로 혐오하고, 백안시하는 모진 현실을 버티는 힘은 “장애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운 적 없다”, “한 집 건너 한 집 다 그래. 그거 별거 아냐”라는 드라마 대사처럼 이웃들의 배려와 따뜻한 말 한마디였다.

4000여 명의 캐리커처를 그리면서 “사람들이 ‘그려 주세요’ 할 때 제일 행복하다”는 정 작가는 드라마를 통해 장애인들과 세상을 연결하는 작은 통로를 열었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마침, 코로나 이후 오랜만에 극장을 찾을 일이 생겼다. 아버지인 서동일 감독이 딸 정은혜 작가가 3년간 아티스트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니얼굴’이 23일 개봉한다.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초청 및 제18회 서울환경영화제 우수상을 받은 작품이다. ‘니얼굴’의 개봉이 경청과 배려, 따뜻한 말 한마디로 제2, 제3의 ‘정은혜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세상에 보여 주고, “제일 행복하다”라면서 춤출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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