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로 입양된 ‘주례’는 왜 빗자루와 걸레부터 들었을까 [형제복지원 '주례' 이야기]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 곽진석 기자 kwa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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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주례' 이야기] 상. 운명의 그날

부산 형제복지원에 있다가 캐나다로 입양된 주례 매티슨(44·여) 씨는 그곳에서 자라면서 정체성 혼란과 외로움 등 수많은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는 2016년 우연히 자신이 형제복지원에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고 다시 인생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경험을 한다. <부산일보>는 매티슨 씨와의 이메일 인터뷰와 형제복지원 기록 등을 토대로 그의 인생 궤적을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기사에 담았다. 또 기획기사를 통해 형제복지원 희생자들의 비정상적인 입양 과정과 실태 등을 전달한다.


내 이름은 주례 매티슨

국적 캐나다… 현재 홍콩 거주

열아홉에 처음 한국 음식 먹고

미각·후각으로 한국 기억했죠

6년 전 AP통신 기자의 전화로

형제복지원 출신임을 알았어요

폭탄 같은 사실을 들은 이후

나는 끊임없이 묻습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안식처 찾기

그의 이름은 주례 알렉산드라 매티슨(Joo-Rei Alexandra Mathieson)이다. 국적은 캐나다, 사는 곳은 홍콩이다.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듯 주례는 한국계 여성이다. 한국계 캐나다인 주례가 홍콩까지 와서 살게 된 것을 설명하려면 그의 인생 시계를 38년 전으로 되돌려야 한다. 주례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그가 6살 때인 1984년 11월 부산의 한 보육원에서 캐나다로 입양됐기 때문이다.

주례가 2009년 관광객으로 홍콩을 처음 찾았을 때 그는 이 도시의 분주함과 들썩임에 매료됐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있으면 결코 혼자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모든 사람이 그와 생김새가 비슷한 동아시아 사람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그는 2015년부터 아예 홍콩에 눌러앉아 버렸다. 다만 중국어를 못하는 주례에게 홍콩 사람이 중국어로 말을 걸어올 때가 조금 번거롭긴 했다.

돌이켜 보면 캐나다는 주례의 안식처가 될 수 없었다. 처음으로 북미 대륙을 밟았을 때부터 그랬다. 주례는 캐나다로 가는 길에 경유한 미국 뉴욕의 JFK공항에서 캐나다인 입양 어머니와 함께 간단하게 식사한 뒤 먹은 음식을 토했다. 서양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입양 부모는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소도시에 살고 있었다. 인구의 99% 이상이 백인이었다.

주례는 혼란스러웠고, 종종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곳에서 자라면서 자신을 백인으로 생각했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아니었다. ‘나는 백인일까? 한국인일까?’ 주례가 10살 때였다. 그는 양아버지와 함께 캐나다 시민권자 문서를 만들기 위해 양식에 내용을 기입하던 중이었다. 주례는 ‘인종(ethnicity)’을 묻는 질문에 자신도 모르게 ‘백인(Caucasian)’ 박스에 표시를 했다. 이것을 본 아버지가 “너는 아니야”라고 일러줬다. 그때의 당혹감과 부끄러움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주례가 아시아 사람과 문화를 처음 접한 것은 19살 때 토론토로 이주한 뒤였다. 토론토 북부에서 먹어 본 한국 음식은 신의 계시와 같은 초현실적인 경험이었다. 한식당에 들어섰을 때 풍겼던 음식 냄새부터 밥이 담긴 스테인레스 그릇과 젓가락은 한국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놓았다. 시금치와 콩자반, 콩나물 반찬에 쌈장, 만둣국, 후식으로 나온 달달한 식혜까지. 주례는 식당에 같이 간 친구에게 외쳤다. “나 이 음식 알아. 이것도 먹어봤고, 이것도 먹어봤어.”


■폭탄같은 진실

주례는 결국 2005년 캐나다를 떠났다. 그리고 미국과 버뮤다, 아일랜드로 옮겨 다니며 일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즐겼다. 홍콩도 그랬다. 주례는 홍콩에 정착한 뒤 한 호텔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의 삶을 통째로 뒤흔드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바로 그 호텔에서였다.

그날은 주례가 홍콩에 다시 온 지 1년이 지난 2016년 9월 30일 금요일이었다. 주례는 토요일부터 미국 출장을 떠나야 했기에 대부분의 일을 그날 마무리해야만 했다. 사실 주례는 새 직장에서 그해 7월부터 두 달간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다. 마치 시속 100㎞ 이상의 속도로 달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주례는 호텔의 스테이크 식당에서 호주에서 온 고객과 점심을 먹었다. 고객이 전화를 거는 사이 잠시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주례의 이메일함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홍콩의 한 홍보회사가 보낸 이메일이 들어있었다. 이메일 내용도 이상했다. “한국에 있는 옛 친구가 당신에게 연락하고 싶어 합니다.” 주례는 생각했다. ‘한국에는 딱 한 명의 친구가 있고, 그 친구는 나에게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을 텐데….’ 그래도 주례는 발신자에게 답장을 보내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그날 오후 4~5시께였다. 주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주례는 이 전화가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했다. 수화기 너머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자신을 <AP통신> 서울지국장 포스터 클럭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주례에게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음… 알겠어요.” 주례는 팔을 뻗어 조심스럽게 사무실 문을 닫았다. 클럭 기자는 이어 주례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 놨다.

그는 “부산의 형제복지원 취재 중에 당신이 거기에 있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면서 “당신의 입양과정에서 불법적인 요소가 있었던 것 같다”고 주례에게 말했다. 형제복지원? 불법입양? 클럭 기자는 수화기 너머로 부산 형제복지원이 어떤 곳이었는지 주례에게 몇 분가량 설명했다. 그들은 취재 중 형제복지원에 있다가 해외로 입양된 아동에 대한 자료를 찾았다고 한다. 형제복지원 입양아동 정보에 주례의 양어머니 이름(매티슨)이 있었는데, 영미권에서 흔한 성이 아니었기에 어머니와 주례를 바로 지목할 수 있었다고 했다.

클럭 기자의 말을 듣고 주례는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클럭 기자는 철로에 갑자기 끼어든 트럭처럼 시속 100㎞로 달리고 있던 주례를 한순간에 멈춰 세웠다. 주례는 그 트럭에 자신이 치인 것 같아 무척 고통스러웠다.

클럭 기자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례라는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냐고 말이다. 주례는 “지금은 조금 힘드네요”라고 답했다. 대화는 중단됐다. 주례는 클럭 기자에게 “내일 다시 통화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다음날 주례는 다시 클럭 기자와 통화를 시도했다. “이제 준비됐어요. 제 이름이 어디에서 왔는지 말씀해주세요.” 클럭 기자는 그의 이름을 ‘황주례’로 지어준 사람이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이었다고 전했다. 주례는 평정심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의 분노와 무력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마치 주례를 자신들의 소유물로 삼기 위해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찍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례 매티슨 씨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부산 형제복지원 철제 대문(위)과 시설 내 풀장(가운데).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소년 원생들이 식당 앞에서 열중쉬어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모습. 부산일보DB 주례 매티슨 씨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부산 형제복지원 철제 대문(위)과 시설 내 풀장(가운데).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소년 원생들이 식당 앞에서 열중쉬어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모습. 부산일보DB

■맞춰지는 퍼즐조각

형제복지원은 주례처럼 이름을 알 수 없는 아이가 입소하면 그들에게 지명을 딴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실종자·유가족모임 한종선 대표는 “원생들에게 형제복지원이 있던 ‘주례’ ‘사상’ 등을 이름으로 많이 지어줬다”고 증언했다.

주례의 형제복지원 신상기록카드에는 밀어 버린 머리 모습을 한 주례의 증명사진이 붙어있다. 입소경위에 대해 “주례동 일대를 배회하던 것을 1982년 11월 23일, 주례 2파출소 의뢰로 본원에 일시 보호된 아동”으로 설명하고 있다. 경찰이 주례를 형제복지원에 보내기 앞서 가족을 적극적으로 찾아주려 한 시도나 노력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

‘기타 특징’란에는 “입소 시 말을 전혀 하지 않음”이라고 짤막하게 적혀 있다. ‘건강상태’ 부문에는 ‘질병’ ‘상이’ ‘허약’ ‘건강’이 나열돼 있는데, 주례는 건강으로 표시돼 있다. 그리고 건강 바로 아래 ‘노동 가능’이라고 표기돼 있는 부분도 눈에 띈다.

주례는 그제서야 캐나다인 입양 어머니가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주례가 입양돼 처음 캐나다의 집에 도착했을 때 주례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빗자루와 걸레를 들었다고 한다. 어린 주례에게는 또 자신의 방에 음식을 숨기거나 비축하는 버릇도 있었다. 보통의 6살 아이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특성들이다.

물이 조금만 차 있는 야외 풀장에서 아이들이 어울려 놀고 있는 장면. 매우 크고 높은 검정색 철제 대문이 탑처럼 솟아 있는 모습. 주례가 캐나다로 입양되기 전 떠올릴 수 있는 시각적인 기억은 이런 것들이다. 그는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주례는 우연히 접한 <부산일보>의 ‘살아남은 형제들’ 인터랙티브 뉴스(brother.busan.com)를 보다가 “유레카”를 외쳤다. 주례의 기억들은 바로 형제복지원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주례는 그날 클럭 기자에게 폭탄 같은 사실을 전해들은 뒤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물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한국에서 헤어졌을 때 엄마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는 누구를 닮았을까? 우리 엄마 아빠는 나를 잃어버리고 얼마나 나를 애타게 찾으러 다녔을까?”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 곽진석 기자 kwa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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