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익의 참살이 인문학] 전문직의 생리(生理)와 윤리(倫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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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의료인문학교실 교수

대혁명 이후 프랑스에서는 ‘○○ 생리학’이란 기묘한 제목의 풍자 문학이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등장한 신흥 귀족과 전문가 집단의 우아한 생존 전략 뒤에 숨어있는 치졸한 욕망과 속물근성 그리고 그 폐해를 파헤친 것들이다. 발자크 등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이 시리즈의 저자로 참여했고, 기자, 의사, 공무원, 법조인 등 지금 한국의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전문 직업들이 모두 날카롭고 치밀한 분석과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었다.

인간과 사회 현상에 대한 용어(윤리나 도덕) 대신 생명의 이치를 일컫는 말인 생리(生理)를 제목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그것은 당시 넘쳐나는 부랑인 환자들을 대상으로 인체의 생리적 기능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던 임상의학의 영향이기도 하며, 젠체하면서도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전문가들의 표리부동이 ‘생명의 이기적 본성’(생리)에 따른 결과라는 암묵적 전제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생리학이란 제목 속에는 다음과 같은 무언의 전제가 깔려있다. “생명은 욕망 덩어리이며 욕망은 대체로 저급하고 부도덕하다. 그 결과가 부르주아, 기자, 의사, 공무원, 법조인이 드러내는 부조리한 삶의 모습이다. 기자 생리학, 의사 생리학, 공무원 생리학은 전문성 뒤에 숨은 뒤틀린 욕망을 드러내는 인간 ‘과학’이다.”

19세기 프랑스 유행 ‘생리학’ 시리즈
전문직의 부도덕한 생리 구조 드러내
21세기 한국서도 참고해야 할 경험

최근 한국의 한 출판사가 19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 생리학’ 시리즈를 번역·출판하기 시작했다. 공공의료 확대에 반대하여 진료실과 학교를 떠났던 의사와 의대생, 꼴찌 수준의 신뢰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언론, 수사와 기소 독점권을 발판으로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른 검사를 보면서 그 독점적 전문성의 생리를 19세기 프랑스 전문직에 대한 비판과 풍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19세기 프랑스와 21세기 한국은 그 시간적·지리적·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 전문직이 막강한 독점적 영향력을 가지는 사회구조를 공유한다. 두 시기 프랑스와 한국 전문직의 공통 생리는 “그들은 자신들의 배부른 파업을 마치 히포크라테스 선서로 여겼다”()라는 문장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자신들의 이익을 고귀한 추상적 가치와 뒤섞어버리는 자기기만의 생리학이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비난부터 쏟아내는 논객”()이 넘쳐나는 것도 두 시기 프랑스와 한국의 공통점이다. 그 비난을 법적 처벌로 바꿀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집단과 이 비난을 쏟아내는 집단의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때 그 표적이 된 국민의 피해는 막대하다. 그런데도 전문가 집단의 독점적 권한을 감시하고 통제할 장치는 별로 없다. 성범죄자의 의사 면허는 아주 쉽게 재발급되고 온 국민이 눈으로 확인한 성 접대 동영상 속 주인공은 여러 차례 무혐의 판정으로 법망을 빠져나간다. 그들이 그러한 특권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독점적 권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마땅한 규제 장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19세기 프랑스의 ‘~생리학’ 시리즈는 전문직의 부도덕한 생리 구조를 드러냄으로써 전문직에 대한 감시와 규제의 발판을 마련했다. 생리에서 윤리로의 전환을 위한 역사적 계기였던 셈이다. 이후 서구 사회에서는 전문직의 자율에 맡겨졌던 면허 관리의 권한을 시민에게 돌려주는 점진적 개혁이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자기 식구 감싸기의 폐해를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었다. 의사다움을 벗어나는 부도덕하거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서는 철저한 조사를 통해 징계가 내려진다. 박탈된 면허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교육과정도 마련하여 단계마다 점검하고 평가한다. 시민의 관점에서 더 이상 피해가 없을 만하다고 판단되면 면허를 재발급한다. 전문가의 입김이 충실히 반영된 법 규정이 아닌 시민의 안녕과 판단이 기준이며, 전문직의 생리에 관한 철저한 분석과 비판을 통해 마련된 윤리적 절차다. 중요한 고비마다 “법대로”를 외치는 우리가 참고해야 할 역사적 경험이다.

생리가 개체 생명의 생존 논리라면 윤리는 공동체의 조직 논리이며 법은 윤리의 최소한이다. 생리에 바탕을 두지 않은 윤리는 공허하고 윤리 없는 법은 위험하다. 이것이 19세기 프랑스의 전문직 생리학이 주는 교훈이다. 이제 우리는 전문직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생존 논리’(생리)를 스스로 드러내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21세기 한국의 전문직 생리학이 필요한 이유다. 21세기 한국의 적나라한 의사 생리학, 기자 생리학, 국회의원 생리학, 검사 생리학, 변호사 생리학, 판사 생리학, 공무원 생리학, 성직자 생리학을 써 보자. 그 바탕 위에 공존의 전문직 윤리를 세운다면 분명 세계인이 공감하는 새로운 삶의 규범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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