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탈원전도, 친원전도 '절대 정책'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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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훈 서울정치팀장

봄날 오후의 고요함을 뒤흔든 강력한 폭발, 그리고 파란 하늘로 맹렬하게 치솟는 엄청난 양의 검은 연기. 11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2011년 3월 12일 일본 후쿠시마 제1원전 발전소 1호기가 수소 폭발을 일으키면서 원자로를 덮은 격납고가 산산조각 났고, 고농도 방사능이 다량 유출됐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25년 동안 수면 아래 있던 원전의 치명적인 위험을 전 세계가 다시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탈원전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 프랑스 등 원전을 운용 중인 대부분의 나라가 강력한 원전 축소 정책을 앞다퉈 내놨다. 탈원전은 안전할 미래를 위한 거스를 수 없는 선택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

후쿠시마 비극에서 출발한 탈원전 조류
10년 세월 속에 상황도 기억도 변해
윤 정부의 본격화된 ‘탈원전 뒤집기’
‘닥치고 추진’ 대신 부작용 숙고해야

5년 뒤 부산은 이 흐름에 커다란 이정표를 남겼다. 세계 최대 원전 밀집지역에 사는 부산 시민에게 원전은 내 삶의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설계 수명이 다한 고리 1호기 폐로가 화두로 떠올랐다.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였던 문재인 의원을 비롯해 부산 야권이 앞섰고, 여당인 부산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의원들도 동참했다. 그 주역들 중 적지 않은 인사들이 지금 대통령실과 여당 내 핵심에 있다. 요즘엔 “탈원전은 원시시대 사고”라는 안철수 의원도 당시에는 그 대열에 있었다. 그리고 2016년 6월 국내 원전 역사상 최초의 폐로 결정이 내려졌다. 효율보다 안전이 중요하다고 믿는 시민들의 결집된 힘이 이끌어낸 묵직한 성과였다. 그 때까진.

시간은 많은 것을 바꿨다. 후쿠시마 사고 11년이 지난 현재 원전에 대한 공포는 희미해졌고, 그 틈을 전력난과 치솟는 에너지 가격으로 절박해진 ‘먹고사니즘’이 채웠다. 그리고 점증하는 기후변화 위기 속에 탄소 중립이 시대적 화두로 떠올랐다. 여러 국가에서 중단된 원전을 다시 가동하거나, 새로 원전을 짓기 시작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 탈원전은 이제 원전 사고를 다룬 영화 한 편에 도취된 전임 대통령의 시대착오적 정책 사례로 바뀌는 중이다. 사실 문재인 정부 탈원전 정책의 가시적인 결과물은 월성 1호기를 폐쇄한 것 정도지만, ‘경제성 조작’이라는 무리수를 동원하면서 탈원전 정책 전반의 정당성이 흔들렸다. 그러나 지난 10년의 시간을 되돌려보면 추진 과정 상의 문제가 있다 해도 시대에 동떨어진 정책이라는 낙인은 고리 1호기 폐로를 성취한 부산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동의하기 어렵다.

윤 대통령의 탈원전 백지화와 원전 육성에 대한 소신은 강력하다. 지난해 6월 대선출마 선언문에서부터 챙겼고, 그 직후 첫 민생 탐방도 거기에 초점을 맞췄다. 지난 22일에는 경남 창원의 원전 기업을 찾아 문재인 정부 탈원전 정책을 “바보 같은 짓”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원전의 경제성과 안전성을 그토록 확신하기까지 어떤 숙고의 과정을 거쳤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유출 사실을 부정한 대선후보 시절이나 “전시엔 안전을 중시하는 관료적인 사고는 버려야 한다”는 최근 발언은 윤 대통령의 원전에 대한 인식이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친원전에 편향돼 있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

그럼에도 탈원전 ‘뒤집기’는 이미 현 여권의 최우선 과제가 된 듯하다. 지난 27일 국민의힘의 정책 의원총회는 탈원전 성토장이었다. 마치 공개 재판에 나선 듯한 분위기에 한국전력 사장은 “탈원전으로 인한 전기요금 인상에 대해 제대로 된 숫자 한 번 내본 적이 없다”고 피해자처럼 하소연했다. 그는 지난해 국정감사 땐 “원전 설비용량은 2025년까지 계속 늘어나며, 현재의 요금 인상은 원전 감축과는 관계없다”고 단언했다. 정권에 따라 갈지자 걸음을 걷는 한전 사장의 ‘웃픈’ 처지와 함께 저마다 선택적인 팩트만 부각하면서 정치적 논쟁의 영역으로 변질된 에너지 정책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탈원전과 마찬가지로 친원전 역시 어느 시대에나 통용될 ‘절대 정책’이 될 수 없다. 더 다양한 요소와 부작용을 폭넓게 분석해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효율을 최대한 살리는 유연한 대처가 필수적이다. 독일이 급격한 탈원전 부작용으로 최근 전기를 수입했다는 사실은 그 독일이 이미 36기 원전 중 33기를 폐쇄한 사실과 함께 검토돼야 한다. 원전 산업계의 피해를 외면해서도 안 되지만,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꼴찌 수준인 우리 재생에너지 사업의 이면과 같이 살펴봐야 한다. 원전은 경제적 잣대로만 보기에는 너무나 치명적인 에너지다. 특히 부산·울산·경남을 비롯해 원전 인근 지역에서는 윤 대통령의 원전 육성 방침에 따라 이미 목 끝까지 찬 핵폐기물 처리장 문제의 적극적인 해결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지만, 여권은 묵묵부답이다. 현재 추진 중인 원전 내 임시저장소를 어물쩍 영구저장시설로 쓰겠다는 속내라면 ‘바보 짓’과는 비교도 안 될 비난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jc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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