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A 컬렉션, 미술관 보고(寶庫) 들여다보기] 174. 단절의 시대 표현, 이혜주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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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주(1962~ ) 작가는 부산대 미술교육과와 부산대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80년대 부산미술계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혜주는 다수의 개인전과 ‘현존시각’ ‘강패전’ ‘부산청년비엔날레’ 등 여러 단체전에도 참여하며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1980년대 한국 미술사를 읽는 키워드로 크게는 ‘모더니즘 계통의 추상미술’과 ‘현실 참여적 민중미술’이 있다. 당시에는 혼란한 시대 상황에 대항하여 자유로운 작가정신을 표출하고자 하는 젊은 작가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제도권 대 민중미술’이라는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소수가 되는 것을 지향하며 자신들만의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한 활동을 펼쳐나간 소그룹 운동은 그 시대 젊은 의식의 발로로 이해할 수 있다.

작은 규모, 게릴라 형태로 일어난 특징을 보이는 소집단 운동은 부산에서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1980년대 부산미술계 또한 ‘제3작업실’ ‘거북의 날개’ ‘강패’ ‘부산사람’ ‘깔치대가리’ 등 다양한 동인에 의해 미술계에 다채로운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이다. 이혜주가 속했던 ‘강패’ 그룹은 부산대 출신의 젊은 작가들이 주축으로 이루어진 미술 동인으로, 1984년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초대전을 시작으로 1985년까지 약 4회의 그룹전을 열었다. 젊은 의식을 작품에 반영해 동시대성을 드러내고, 작가들의 목소리를 모아 의기투합의 장을 만드는 것을 주요 기치로 내세웠으며 공영석, 김미진, 이진용, 홍순명 등이 함께 활동했다.

이혜주의 작품은 마치 무성영화의 한 장면을 화면에 담아낸 듯하다. 긴장감이 흐르는 정적인 화면 속 인물들은 표정없이 존재한다. 이혜주의 1980년대 작업에서는 이러한 익명의 인물과 함께 닫힌 문·벽·창문 등이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격변하는 사회 속 개인으로서 작가의 심리상태를 드러낸다. 대부분의 작품명이 ‘무제’인 것에서도 화면 속 상황이 암시하는 심리적 상태를 강조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사회적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강조하는 경향으로 나아간다.

‘무제’(1996) 속 인물들의 뭉개진 얼굴은 몰살된 개인의 개성을 은유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이렇듯 무명인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화면 구성에 있어 두 집단은 사뭇 다른 분위기를 띈다. 상단 면에 존재하는 인물들은 밝은 색채로 표현되어 있으며 하늘을 쳐다보며 팔을 들어 올리는 역동적인 상승의 제스처를 보이는 반면, 어두운 색채로 이루어진 화면 아래의 군중들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들의 몸은 마치 하나의 덩어리처럼 투박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개인의 개성은 지워진 채 사회를 지탱하는 구성원이라는 최소한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익명의 존재들로 구성된 두 군중의 오묘한 충돌은 화면에서 드러나는 구도와 상반된 색채를 통해 공존이 아닌 단절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사회를 표현하고 있다. 김경미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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