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죽음 후에
이소정 소설가

삶에 대한 기억은 누구의 것이고 그 유효기한은 언제까지일까. 얼마 전 싸이월드는 사망한 회원의 게시물 저작권을 유족에게 돌려주는 ‘디지털 상속권 보호 서비스’를 시작했다. 내 친구들은(우리는 아이러브스쿨의 세대이자 싸이월드의 세대다) 이를 두고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긍정적인 쪽은 아무래도 유족의 입장이었다. 사진과 글이 남은 이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냐고 그건 일종의 그리움과 추억의 자산이라고 했다. 반대의 입장에서는 죽은 이들에게도 프라이버시가 있다는 입장이었다. 잊힐 권리처럼 자신이 결정하지 않았던 정보가 함부로 공개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했다. 거기에는 숨기고 싶은 일이나 오히려 상처가 되는 것들도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몇 년 전 갑작스럽게 친구를 잃은 적이 있다. 장례식장에서 우리는 이대로 친구를 보낼 수 없다는 마음이 너무 커서 뭔가를 하자고 마음을 모았다. 일 년 뒤 우리는 조촐하게 출판기념회를 했다. 죽은 친구는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친구였다. 유족의 동의를 얻어 그것들을 엮어 유고 에세이집을 냈다. 겨울의 인사동, 작은 전시 공간에 친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였고 벽면에는 친구의 생전 모습이 확대되어 상영되고 있었다. 우리는 친구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즐겁게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그날 나는 꽤 두툼한 책을 한 권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죽은 친구가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후 나는 그 책을 펼쳤지만 다 읽지 못했다. 글이나 사진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내밀해서였다. 특별히 비밀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이게 맞나, 친구가 이걸 원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소설을 쓰고 나서부터 나는 거의 모든 장소에 노트북을 들고 다닌다. 절대 글을 쓸 수 없는 장소라도 노트북을 들고 가지 않으면 불안하다. 내 몸의 한 부분처럼 그렇게 됐다. 언젠가 나는 내 가족이 아닌, 글에는 전혀 관심 없는 친구에게 내가 갑자기 죽는다면 우리 집에 몰래 들어와 노트북을 훔쳐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걸 부수거나 물에 던져 달라고. 내 습작을 누군가 보는 것이 부끄럽고 그 글들은 나에게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친정엄마는 조금 먼 거리를 갈 때 늘 좋은 속옷을 입는다. 죽어서 발견될 때 낡은 속옷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내가 아는 사람은 코로나로 몸이 너무 아픈 와중에 일어나 냉장고 정리를 했다고 한다. 혼자 사는 어떤 소설가는 매일 밤 자신이 마신 술병을 분리수거장에 갖다 버려야만 잠이 들 수 있다고 했다. 덜 영근 글이 가득한 노트북과 낡은 속옷과 정리되지 않은 냉장고와 빈 술병들. 누가 그걸 볼까 봐. 죽음으로도 덮어지지 않을 것들이 있다고, 삶이 끝나도 보호받아야 할 것들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죽음은 못다 한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디지털 유산은 ‘개인 정보 보호’라는 틀에 묶여 유족들의 접근이 쉽지 않았다. 2004년 이라크전에 참전했다 숨진 해병 저스틴 마크 엘스워스 병장의 부모는 야후에 소송을 걸어 그의 이메일 데이터를 제공 받았다. 관련 법제화는 2013년에 다시 크게 논의됐다. 미국 버지니아주 15세 소년 에릭 래시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부모는 죽음의 단서를 알고 싶어 페이스북에 접근했지만 실패했다. 이 사건이 유명해지며 버지니아주에서는 미성년자 사망 시 온라인 통신 기록을 60일 동안 유족이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지난달 말까지 싸이월드 디지털 상속권 보호 서비스의 신청 건수는 2381건이라고 한다. 남은 자들의 마음이 죽음이라는 건널 수 없는 강 저편을 향해 보내는 손짓은 더 늘어날 것 같다. 상속권과 개인 정보 보호, 두 가지의 가치 중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할까. 나와 친구들은 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