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재파의 생각+] 두 바퀴로 가는 영어상용화
동아대 기초교양대학 교수·공모 칼럼니스트
최근 2030월드엑스포를 계기로 부산을 글로벌 허브 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한 여러 방안이 마련되고 있다. 하드웨어적 측면으로는 신공항 건설이 있고, 소프트웨어적 측면으로는 영어상용화 정책을 들 수 있다. 영어상용화 정책은 영어 교육과 영어 친화적 환경 조성을 통해 시민들의 영어 능력을 향상해 외국인이 부산에서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는 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글로벌빌리지 추가 조성, 영어 방송 프로그램 강화 등 다양한 정책이 추진될 전망이다.
영어는 세계 공용어이므로 세계 여러 나라의 사람, 상품,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물류 도시에서 영어상용화는 필수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싱가포르, 홍콩과 같은 도시는 영어공용화를 통해 국제 물류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부산의 경우 여러 설문조사에서 국제회의나 비즈니스의 어려움으로 의사소통이 1위로 꼽힐 만큼 영어 사용에 어려움이 많아 영어상용화 필요성이 강조된다. 따라서 현재 논의되고 있는 영어상용화 정책은 일면 바람직하다.
‘글로벌 허브 도시 부산’에 영어 중요
외국어 구사는 모국어 능력에 영향
국어·지역 방언 육성 병행해야 유리
부산의 영어상용화 정책은 한국어 사용을 기본으로 하되 영어를 추가로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러한 언어 정책은 미국에서 시도한 영어에 더하여 하나 이상의 다른 언어에도 능숙해 보자는 ‘English Plus 운동’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Korean Plus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부산의 영어상용화 정책은 우리 모국어인 국어와 부산 지역 방언의 사용과 보존을 전제로 영어 능력을 배양할 수 있게 계획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부산시는 국어와 지역 방언의 보존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국어기본법은 공공기관이 공문서 등을 작성할 때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을 한글로 작성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부산의 공공기관 보도자료나 공문서에 보이는 무분별한 한자어, 외래어 사용 문제는 꾸준히 지적되고 있지만, 개선되지 않고 있다. ‘부산 지역어 등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공공언어 문서에 사용된 용어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는 응답은 70%가 넘으며, 공공언어 오류는 4000여 건에 육박한다고 한다.
방언은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지역 방언에는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 삶이 담겨 있어 보존이 필요하다. 특히 부산 방언은 최근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 매력 있게 묘사되어 부산 방언 자체가 언어문화 상품으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부산 방언은 보존 가치가 크지만, 보존을 위한 노력은 매우 미미하다. 제주도에서는 28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제주어 사전〉을 발간하는 등 지역 방언 보존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부산은 변변한 방언사전 하나조차 없으며 고작 한 해 예산 1000만 원을 들여 지역어 조사 사업을 진행하고 있을 뿐이다.
영어상용화 정책은 국어와 지역 방언 보존이 전제되어야 한다. 국어와 지역 방언에 대한 보존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영어 교육과 영어 사용 확대에만 정책과 예산을 집중한다면 민족어를 홀대하고 사대주의에 빠졌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국어 정책은 보존적 측면에서도 의의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어상용화에도 도움을 준다. 왜냐하면 외국어 능력은 모국어 능력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지난해 EBS의 ‘당신의 문해력’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영어 교사는 학생들이 한국어 단어 뜻을 몰라 영어 단어를 가르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국어 능력이 낮으면 영어 능력도 향상될 수 없으므로 국어 보존에 대한 정책뿐만 아니라 국어 능력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교육, 육성 정책도 영어상용화 정책에서 함께 논의될 필요가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외국인 정주 여건 개선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영어상용화와 함께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 정책도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외국인이 부산을 단기 방문할 때는 영어 친화적 환경만으로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부산에 정주할 때는 그들이 영어만 사용하면서 이방인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를 학습하고 한국문화에 적응하여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통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장기적 관점에서 부산이 글로벌 허브 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영어상용화와 함께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 정책도 준비해야 한다.
영어 교육과 영어 친화적 환경 조성에만 초점을 둔 현재의 영어상용화 정책은 한쪽 바퀴가 빠진 자전거와 같다. 민족어인 국어와 지역 방언의 보존과 육성,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 정책이라는 나머지 바퀴를 함께 연결하고 달려야 글로벌 허브 도시라는 목적지에 성공적으로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