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대통령과 ‘헤어질 결심’
김희돈 편집부장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 컷. CJ ENM 제공
마침내,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의전당을 지척에 둔 행운아로서 주말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가 영화 관람이다. 최근 한두 달 이런저런 사정으로 취미생활을 누리지 못하다 지난 주말 기회를 잡았으니 ‘마침내’라고 해도 지나치진 않을 것 같다. 사실 ‘친절한 톰 아저씨’로 불리는 톰 크루즈 주연의 ‘탑건: 매버릭’과 추앙 신드롬을 일으킨 손석구의 악역이 화제가 된 ‘범죄도시 2’도 필관 리스트에 있었다. 하지만 단 한 편을 위한 시간이 주어진 상황에서 선택은 단연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었다.
영화 포스터에 칸영화제 상징인 종려나무 잎사귀가 반짝여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파격적인 소재나 그로 인한 다소 폭력적 설정, 혹은 극단적 표현 수단을 마다하지 않는 박 감독의 작품세계를 불편해하는 분들이 꽤 있고, 나 역시 상당 부분 공감하고 있기도 하다. 봉준호 감독과 함께 국내외 영화판에서 거장으로 인정받는 박찬욱이지만, 그의 연출작은 봉 감독 영화와 달리 가족이나 친구·연인과 함께 편하게 볼 수 있는 작품과는 거리가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약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그의 뚜렷한 작품세계와 고집스레 추구하는 특유의 미장센은 ‘N차 관람’이라는 방식으로 조용한 흥행을 이어가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박찬욱 영화 ‘헤어질 결심’을 봤다
안약을 넣어도 뿌옇기만 한 현실
70일째 살아 내는 윤석열 시대처럼
공정과 상식 강조 첫 다짐 생생한데
국민은 ‘사적 채용’ 논란에 지쳐 가
더 늦기 전에 헤어질 결심 따라야
박찬욱의 대표 필모그래피로 남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 ‘헤어질 결심’ 역시 쉽게 이해되거나 마냥 편히 즐길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거두절미하고 한 줄로 표현하자면 ‘변사사건 수사를 맡은 형사와 살인 용의자의 사랑이야기’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느낀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러닝타임 내내 스크린을 채운 건, 수시로 안약을 넣어도 늘 뿌연 안개에 둘러싸인 것처럼 불투명한 현실과 휴대폰 통역 앱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희미하게나마 상대방의 의사를 짐작할 것 같은 답답함이었다.
5월 10일 이후 70일째 ‘윤석열 시대’를 살아 내면서 거의 매일 느끼는 감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정과 상식의 회복’이라는 비교적 간명한 구호를 내세워 출범한 윤석열 정부가 불과 두 달여 만에 국정수행지지도 30% 초반대로 고꾸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어퍼컷을 앞세워 치고 나가려는 대통령의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첫째 요인은 단연 인사논란으로 보인다. 김인철·정호영·김승희·송옥렬까지 윤 정부 들어 낙마한 장관급 후보자가 이미 4명이다. 간신히 임명된 이 중에도 논란 인사가 적지 않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엔 만취 음주운전 전과자가 임명되기까지 했다. 기어코 인사를 강행해야 할 불가피 상황이었다면, 야당과 국민에게 충분히 사정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게 상식일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되레 엉뚱한 항변을 해 버린다. “전 정권에서 지명된 장관 중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 봤어요.” 패착 중에도 이런 패착이 있을까.
장관급 인사뿐만이 아니다. 대통령 부인이 운영한 회사 직원과 선거 캠프 출신 인사들이 은근슬쩍 대통령실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적 채용’ 논란도 집권 초 지지율이 곤두박질친 ‘취임덕’ 원인으로 꼽힌다. 때마침 나온 유승민 전 의원의 냉정한 진단이 눈길을 붙잡는다. 지난 16일 부산을 찾은 그는 “대선에서 윤석열 캠프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모든 자리를 차지한 상황에서 그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온 해법만으로는 힘들 것”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하지만 대통령의 인식도 이러한지는 불투명하다. 오히려 ‘신윤핵관’으로 불리는 국민의힘 배현진 최고위원의 “전 정부의 포퓰리즘 정책으로 인한 부채 고지서 탓”이라는 한가한 항변을 듣고 나면 또다시 눈앞에 안개가 자욱해지는 느낌이다.
그래도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남은 4년 9개월여 동안 계속 절뚝거릴 수는 없으니 말이다. 또 한 명의 실패한 대통령을 보고 싶어 하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대통령 역시 헌정사의 오점으로 남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나서야 한다. 해법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윤석열 시대를 열어 준 공정과 상식을 회복하는 것 말이다. 말은 쉽지만 실행은 말처럼 간단치 않을 수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게 대통령의 결심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 맺은 사적 인연, 그리고 대통령이 되도록 헌신한 캠프와 제대로 헤어질 결심 말이다.
다시 박찬욱 영화 ‘헤어질 결심’ 이야기다. 변사사건을 맡은 형사는 종반부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섣불리 결론지은 사건이 실은 제대로 종결되지 않은 미결 상태였음을 알았다. 그땐 이미 반듯한 형사의 자부심은 ‘붕괴’된 지 오래였고 사랑했던 여인도 사라지고 없었다. 파도가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손전등을 비추고 눈물로 외쳐 보아도 무너지고 떠나간 것들이 돌아오는 기적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결심은 빠를수록 좋다. 파도가 덮치기 전에.
김희돈 기자 happy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