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변하기 쉬운 마음
“왕시루봉 느진목재 오르는/ 칙칙한 숲 그늘에 가려/ 잘디잘고 화사하지도 않은/ 제 꽃으로는 어쩔 수 없어/ 커다랗게 하얀, 혹은 자줏빛 몇 송이 헛꽃을 피워 놓고/ 벌 나비 불러들여 열매를 맺는/ 산수국 애잔한 삶 들여다보니/ 헛되다고 다 헛된 것 아닌 줄 알겠구나.”(김인호 시 ‘산수국’)
7월, 안개비에 촉촉이 젖은 숲 사이로 고개를 내민 형형색색의 산수국에 발길을 멈추지 않을 수 없다. 떠난 첫사랑의 추억과 함께 그 옛날 전설도 떠오른다. 옛날 옛적 어여쁜 소녀가 고을 원님의 아들과 사랑에 빠졌다. 결혼을 약속한 소년이 선물한 나무 한 그루는 탐스러운 꽃이 피어 처음에는 자주색에서 하늘색, 다시 연분홍색으로 변했다. 소녀가 불길함을 느낀 그날 밤, 원님의 아들은 죽고 말았다. 슬픔에 빠진 소녀가 떠난 폐허가 된 집에는 산수국이 지금도 피고 진다고 한다.
산수국은 토양에 산성이 강하면 파란색, 알칼리성이 강하면 분홍색, 중성이면 흰색으로 꽃 색깔이 달라진다. 이 때문인지 산수국 꽃말도 ‘변하기 쉬운 마음’ ‘변덕’ 등이다. 야생의 산수국은 실제 열매를 맺는 진짜 꽃 가장자리에 크고 아름다운 가짜 꽃을 먼저 피운다. 가짜 꽃은 나비나 벌 같은 곤충을 유혹하여 진짜 꽃의 수분(가루받이)을 돕는다. 수정이 이뤄져 열매를 맺으면, 가짜 꽃은 땅으로 뒤집히면서 말라 죽는다. 생명을 잇는 역할이 끝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산수국을 ‘뒷모습이 아름다운 꽃’이라고도 부른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최근 SNS에 “산행 중 산수국 군락지를 만났습니다. 장소는 비밀. 내년에 산수국이 만개했을 때 또 올게요”라는 문구를 사진과 함께 올렸다. 문 전 대통령의 사저 뒤편 경남 양산 영축산 일대에는 7월 장마철이면 산수국이 여기저기서 자태를 뽐낸다. 사저 앞 보수 유튜버 시위 등 한국 사회의 반목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문 전 대통령의 ‘산수국’ 해시태그로 인해 그 꽃말이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정치 지도자 모두가 산수국처럼 우리 사회가 토양과 환경에 따라 꽃 색깔이 시시각각 변하면서, 국가 생존을 위해서 언제라도 희생하겠다는 가짜 꽃의 마음을 떠올릴 수는 없을까? 숲속 깊은 곳에 피어서 후손을 남길 열매를 맺는 산수국처럼,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마음, 희생하는 지혜는 ‘헛되다고 다 헛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변하기 쉬운 마음’이란 산수국 꽃말을 ‘희생하며 나아가는 마음’으로 바꿨으면 좋겠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