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뱀을 만나다
등산로를 걷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기는 했지만 그곳은 많은 이들이 오가는 곳이었다. 약수 뜨는 여인들, 산악자전거 타는 청년들, 울긋불긋한 차림의 등산객들이 시간대를 가리지 않고 모여드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신기하리만큼 빨리 움직이는 지렁이를 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지렁이가 아니었다. 어떤 지렁이도 저렇게 급한 S자를 그리며 신속하게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한 일은 강아지의 (목)줄을 잡아당기는 일이었다. 강아지가 뱀을 먼저 발견했다면, 틀림없이 다가가서 냄새부터 맡으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단히 줄을 움켜쥐고 나서야, 길을 가로지르는 뱀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그 역시 급해 보였다.
인간 피하려는 ‘필사의 탈출’ 목격
뱀이 보여준 다급한 S자 의미는
제발 나를 짓밟지 말라는 ‘SOS’
‘낯섦’ 겨냥한 적대감은 편견일 뿐
얽히고설킨 각자의 길 존중해야
뱀을 만나는 순간, 사람들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고 한다. 나 역시 그러했다. 비록 작은 뱀일지라도 이 낯선 생명체가 가져온 충격은 상당했다. 뱀이 길을 가로질러 풀숲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리면서, 그 ‘하얀 충격’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이들은 오래전부터 인간의 DNA에 누적된 본능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본능이나 흉측함만으로, 그 충격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세상에는 파충류를 애완동물로 키우며 사랑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들에게 뱀이란 나에게 강아지와 다를 바 없는 소중한 존재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혹여 알 수 없는 적대감은 훈련된 것은 아닐까. 어쩌면 반복적으로 주입되어 특별하게 생성된 감정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어려서부터 뱀을 불길한 동물로 낙인찍어 생각하기 일쑤였고 뱀의 독은 인간을 해치는 해악으로 이해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뱀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악마를 바라보는 시각과 겹쳐지곤 했다. 그렇다면 그 적대감은 뱀을 사악한 동물로 규정하는 편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한 시인은 어항 속의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 작은 세상에도 물풀의 길과 물고기의 길이 따로 있다고 말했다. 물풀이 자라면서 올라오는 길이 있고, 그 옆으로 물고기가 조심조심 지나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물풀도 한 포기일 수 없고 물고기도 한 마리만이 아니라고 할 때, 또한 어항 속에 다른 생명체도 살아가야 한다고 할 때, 어항이라는 세상을 유지하는 힘은 각자의 길을 각자의 방식으로 갈 수 있는 길 이외의 것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산도 다르지 않다. 산에는 뱀이 다니는 길이 있고, 강아지가 다니는 길이 있으며, 사람이 다니는 길이 있어야 한다. 그 길들은 겹쳐지기도 하고 공유되기도 할 터이지만, 그 얽히고설킨 길에서 각자의 길만 존중될 수 있다면 산속 세상 역시 무리 없이 유지될 것이다. 작은 뱀으로서는 더욱 그러하다. 인간만큼 크고 강력한 힘을 가진 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그들의 길이 그 무엇보다 필요했다.
뱀에게 하얀 공포와 막연한 적대감을 느끼는 것은 뱀의 길을 부인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산속에 길을 내고 그 길에 침범하여 약수를 뜨고 자전거를 몰고 등산화로 짓밟곤 한다. 이때 뱀이 느낄 공포는 가벼운 것일 수 없다. 등산화의 위협은 거세졌고, 자전거의 속도는 뱀의 속도를 능가한 지 오래이고, 약수통은 뱀을 압사하기에 충분한 무게이다.
그날의 뱀이 필사적이었던 이유는 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사람이 없는 틈에 두렵고 위험한 길을 건널 속셈이었지만, 갑자기 등장한 나로 인해 발도 없는 몸을 더 재게 놀려야 했을 것이다. 그가 그려냈던 S자 다급함은 그만큼 발버둥 쳐야 하는 삶의 궤적은 아니었을까. 사람 사회에서도 다급한 S를 본다. 자신을 위협하지 말라고, 자신을 짓밟지 말라며, 필사적으로 외치는 다급한 SOS 역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