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사람 남편과 함께 한 산복도로 40년, 아내이자 며느리의 삶 [산복빨래방] EP 10.
[산복빨래방] EP 10.
산복은 아름다워-부연 씨 이야기
안녕하세요 산복빨래방입니다. 산복빨래방은 부산 산복도로 호천마을에 있는 무료 빨래방입니다. 하지만 엄격히 말해 무료는 아닙니다. 어머님, 아버님들은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소중한 '라떼는’ 이야기를 저희에게 세탁비로 지불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빨래방에 오기 위해 1km 이상을 항상 걸어오는 배부연(66) 어머님이 2개월간 우리에게 주신 이야기를 공개하려 합니다.
1970년대 산복도로는 부산항 '뱃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부산항은 1970년대 해운 산업의 발전으로 호황을 누렸습니다. 부산항과 가까운 산복도로에도 많은 '마도로스'들이 정착했습니다. 배부연 어머님의 남편도 항구가 삶의 터전인 기관장이었습니다. 항해 나간 남편을 기다라며 보낸 40년 세월에는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16살 여공
그 시절은 다 그랬다. 경북 청도에서 부산 사상 신발공장으로 부연 씨는 ‘취직 유학’을 왔다. 작은 엄마는 “부산 고무공장이 수입이 짭짤하다”고 말했다. 부연 씨는 어렵지 않게 부산행을 결정했다. 16살이었다. 부연 씨가 다니던 공장은 꽤 큰 신발 공장이었다. 직원만 3000명이 넘었다. 기숙사도 있었다. 부연 씨는 공장 부녀반에 들어가 미싱을 돌렸다. 며칠 미싱을 돌린 뒤 부연 씨는 승진(?)했다. 개발과는 신발 견본을 만드는 부서였다. 미싱 실력이 뛰어난 여공들이 주로 일선 공장 라인 대신 개발과에서 일했다. 부연 씨도 그랬다. 부연 씨는 젊은 나이에 일을 시작해 개발과에서 부연 씨 표현대로 ‘좀 날리는 여공’이었다. 손재주가 뛰어났던 탓에 새로운 견본도 척척 잘 만들어냈다. 공장에서 적십자 봉사 활동도 다니고 부연 씨의 삶이 곧 고무 공장인 삶이 8년간 계속됐다. 돌려 말하면 그렇게 8년 일만했다.
24살. 부연 씨는 남편과 결혼해 평생을 살게 된 산복도로로 왔다.
■‘뱃사람’ 남편
부연 씨의 ‘부산 드림’은 행복했다. 하지만 그 맘 때 공장 언니들, 지인들의 말이 귀에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배 양, 아직도 시집 안 가고 뭐하노?” 공장에서 알던 언니들은 왜 결혼 안 하냐며 부연 씨를 닥달했다. 16살의 막내 여공이 당시 기준으로는 결혼할 나이었다. 여느 때처럼 미싱을 돌리고 있을 때 정문에서 연락이 왔다. 누군가가 찾아왔다고 했다. 나가보니 공장에서 알게 된 언니였다. “배 양, 내가 중신 하나 설게, 한번 만나봐”
부연 씨는 남편을 처음 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키가 작았던 부연 씨는 키 큰 남편이 마음에 들었다. 남편의 직업도 멋져 보였다. 남편은 부산항에서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선박 기관장이었다. 경남 통영 욕지도 출신 남편과 그 해 1981년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은 키가 180cm가 넘었다. 키가 작았던 부연 씨는 남편의 큰 키가 좋았다.
■8남매의 맏며느리
남편 집은 부산 산복도로 산동네 호천마을이었다. 일곱 명의 동생이 시집 온 부연 씨를 맞이했다. 남편은 3남 5녀의 장남이었다. 요즘 같으면 결혼을 망설였을 법도 했지만 부연 씨는 8남매가 어색하지 않았다. 부연 씨 집은 9남매였다. 마을에 처음 왔을 때 산복도로라 불리는 도로도 없었다. 비포장에 돌이 불뚝불뚝 솟은 길 뿐이었다. 뱃사람인 남편은 부산항에서 출항하면 1~2개월 후 집으로 왔다. 집에는 시동생들과 시어머니 뿐이었다. 시어머니는 맏며느리를 꼼꼼하게 그리고 혹독하게 가르쳤다. 시어머니는 마루에 앉기 전 항상 마루 바닥을 손으로 쓱 닦고 앉았다. 부연 씨는 바닥을 닦는 걸레를 속옷보다 깨끗할 정도로 빨았다. 부연 씨 기억에는 걸레인지 속옷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집안 식구들 뒷바라지는 부연 씨의 몫이었다. 빨래부터 육아까지 시어머니가 하나부터 열까지 부연 씨를 가르쳤다. 빨래를 할 때면 키가 커서 좋았던 남편의 큰 바지와 큰 셔츠는 유독 야속했다. 남편과 12살 차이 나는 막내 시동생은 사실상 부연 씨가 키웠다. 빨래하랴, 밥하랴 시동생들 뒷바라지에 남편 보고 싶을 겨를이 없었다. 시어머니가 딸 3명을 함께 돌봐줘 다시 고무공장에 다닐까도 생각했지만 남편은 부연 씨가 바깥 일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다행히 세월이 지나면서 식솔은 줄어들었다. 일곱 형제는 하나둘 출가를 했다.
기관장이었던 남편은 한번 출항하면 1~2달은 돼야 돌아왔다. 요즘에야 스마트폰 영상 통화가 있지만 그 당시에는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전화는 마을 부잣집에나 겨우 한 대씩 있었다. 부잣집에서 “전화왔다”고 소식을 알려주면 하던 일을 멈추고 뛰어가 전화를 받았다. 무뚝뚝한 남편은 “나 낼모레 부산 들어가요”라는 말만 하고 끊었다. 항해 중이던 남편은 아버지의 마지막도 지킬 수 없었다. 시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선주를 통해 시아버지 부고를 부랴부랴 전했지만 침묵 끝에 돌아온 말은 “잘 화장해서 모시라”는 말 뿐이었다. 뱃사람이 집안 중대사를 못 지키는 건 흔한 일이었다. 맏며느리 부연 씨는 남편이 자리를 비운 산복도로 호천마을에서 그렇게 집안을 지켰다.
남편은 배를 타다가 좋은 풍경이 보이면 부연 씨에게 영상통화를 건다.
■산복도로 40년
부연 씨의 집은 처음 시집 온 그 집 그대로다. 처음 시집와서 시누이, 시동생 시집 장가 보내고 딸 3명도 모두 출가했지만 아직도 집은 산복도로다. 조금씩 수리를 했을 뿐 바뀐 건 없다. 딸들은 엄마가 나이 들면서 몸이 아픈 게 그 언덕 많고 계단 많은 산복도로 때문이라며 옮기라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산복도로를 떠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1년에만 수차례 바다로 떠나는 남편이지만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살던 산복도로 집이 가장 편안한 보금자리라고 말한다. 남편은 40년째 부연 씨 마음 아플까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난다. 71세 나이지만 일하는 게 좋다며 떠나는 남편의 뒷모습을 수십 년 봤지만 늘 마음이 아프다. 남편이 일을 가고 나면 이제 집에는 혼자다.
“남편이 아무 말 안하고 바다로 일하러 가는 걸 보면 한편으로 마음이 아파. 좋아해서 하는 일이지만 바다는 항상 위험하잖아. 항상 뒷모습을 보면 맨날 걱정이고 연락 올 때까지 안전하게 잘 있는가 싶지. 우리나라 근처에서 작업을 해도 바다에서는 연락이 안되는 지역도 있어. 딸들도 잘 커줬고 자식 낳고 사위들이랑 오순도순 사니까 얼마나 고마워. 우리 아저씨도 그렇고 딸도 사위도 그렇고 건강만 하면 좋겠어. 건강이 최고지 뭐”
부연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부연 씨는 "지금까지 바다를 누비는 남편과 잘 자라준 딸들에게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빨래방에 오시는 부연 어머님은 참 소녀 같습니다. 옛날 이야기를 하며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하고 재미없는 농담에도 항상 크게 웃어줍니다.
가끔 몸이 안 좋으셔서 며칠 집에 있었다고 말씀 주실 때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합니다. 어머님 말씀대로 앞으로도 항상 웃는 모습 간직하신 채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산복빨래방은 배부연 어머님의 삶에 경의를 표합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김보경 harufor@busan.com , 이재화 jhl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