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의 생각의 기척] 에게해 여행에서 듣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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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철학자

섬과 섬 사이 오가며 슈베르트에 새삼 매료

때 이른 죽음과 겹쳐 애잔한 미완성 소나타

승승장구만 추구하는 맹렬한 직진의 삶과

이런 음악을 듣는 취향이 양립할 수 있을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그리스 아테네. 오랫동안의 코로나 봉쇄를 뒤로하고 여행을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지난번 여행이 줄곧 동지중해를 내려다보며 좁고 가파른 터키 남서부 지역의 산길을 걸었던 트레킹이었다면, 이번은 다양한 선박을 타고 그리스의 섬과 섬을 오가는 에게해 여행이다. 여기 아테네에도 그리스령 코스섬에서 대형 페리보트를 타고 장장 12시간을 항해한 끝에 당도한 것이다.

에게해를 찬미한 사람은 많지만 에게해를 항해하는 것이야말로 축복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였다. 하긴 에게해는 남쪽에 있는 그의 고향 크레타섬과 서쪽의 그리스 그리고 동쪽의 터키가 둘러싸고 있는, 한반도보다 조금 작은 바다다. 카잔차키스의 말대로라면 나는 행복한 사람 축에 들고도 남을 듯하다. 더욱이, 국내에서 두목 멧돼지와 그 아래 맹목적 출세 지상주의자 졸개 멧돼지 떼가 설치는 모습이 보기 싫어 작심하고 떠나온 이번 여행이 아니었던가.

섬과 섬 사이를 오가는 장시간의 배 여행에서 필수품은 단연코 휴대용 오디오 기기다. 나는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이어폰과 많은 음악 파일을 챙겨 넣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많은 음악 파일 중에 이번 여행에서 자주 듣게 되는 음악은 슈베르트이고, 그중에서도 특히 그의 ‘미완성 피아노 소나타 D.571’에 손이 많이 가게 된다. 미완성이라 했지만 제1악장만, 그것도 다 마무리되지 못한 채 잘린 조각으로 남겨졌으며 연주 시간도 8분을 넘지 않는다. 이 곡은 ‘단편(斷片) 소나타’로 불려야 할 것이다.

슈베르트의 이른 죽음(그는 서른한 살에 세상을 떴다)은 필연적으로 수많은 미완성 작품과 미완성이라 부르기에도 부족한 파편화된 작품들을 남겨 놓았다. 이는 특히 그의 피아노 음악에 잘 들어맞는 말인데, 11곡의 완성된 피아노 소나타와 10편의 단편 소나타, 또 다른 4편의 단편적 악장으로 이루어진 예사롭지 않은 피아노 소나타의 세계가 남겨져 있다. 게다가 이 미완성이나 단편 소나타 대부분이 완성된 피아노 소나타 못지않게 뛰어나다는 특이점도 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이 단편적 악장 D.571에 푹 빠지게 된 건 아마 이 곡이 보여 주는 신비롭고도 멜랑꼴리한 음의 진행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의 나이 20세에 작곡된 이 곡은 쉽게 접하기 힘들고 다소 로맨틱하기도 한 올림바단조이다. 처음에 왼손이 야상곡이나 슬픈 자장가 같이 시작하고 오른손이 쓸쓸한 멜로디로 이를 쫓아간다. 초기 작품임에도 내림마장조나 내림다장조 같은 매우 비범한 화음 전개가 엿보이기도 한다. 슈베르트는 전개부 끝부분의 어느 5도 음에서 돌연 이 곡을 중단해 버렸다. 실연 때문이었을까, 더 급한 다른 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지금으로서는 감당 못할 걸작의 가능성을 예감하고는 자신의 작곡 실력이 숙성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일까. 그러다가 안타깝게도 때 이른 죽음이 그 기회를 앗아가 버린 것일까.

이 곡을 들을 때마다 기척을 일으키는 어떤 생각, 아니 생각이라기보다는 어떤 의문이 있다. 이 음악을 애써 찾아 듣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이번 선거에서 2번을 찍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만약에 있다면 그는 어떤 사람일까? 이 곡을 사랑하는 사람이 동시에 ‘능력제’(meritocracy는 ‘능력주의’라 번역되고 있지만 필자는 ‘능력제’라고 번역하고자 한다. bureaucracy를 ‘관료제’로 번역하듯이)를 맘 편히 받아들여 경쟁에서 승승장구하며 잘 살 수 있을까?

이 곡을 들으면서 이를테면 멜랑꼴리한 감성 구조에 빠져드는 사람이, 자신이 속한다고 생각(사실은 착각)하는 정치 진영이 어느 쪽이건 상관없이 우리 사회의 지배적 음악 취향으로 군림하는 트로트 음악을 동시에 애청할 수 있을까? 이 음악을 접하면서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일반화된 라이프 스타일과 가치관을 의심 없이 품어 안으며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계속 직진만 할 수 있을까? 의문은 더 확대된다, 이렇게.

다른 모든 면에서는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사람들이 유독 정치적 입장에서만 다르다고 한다면 과연 그 정치적 다름은 진정한 것일까, 아니면 아직 인식에 이르지 못한 허위의식에 불과한 걸까? 그러니까 먹는 것, 입는 것, 여유 시간을 보내는 방식, 술 마시는 방식, 즐겨 듣는 음악, 손이 먼저 가는 책, 여행하는 방식, 가족과 자식을 대하는 방식 등등에서 대동소이한 사람들이 질적으로 다른 정치적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명확하다. 우리 대부분은 아직까지 정치적 자기이해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어쩌면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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