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공장 넉 달 치 월급 모아 컴퓨터 사 줬더니, 그 아들이 대기업 연구원 됐어~”
산복도로 다른 이름 ‘엄마’
8남매 뱃사람 만나 식구 챙기고
자식 키우려 궂은일 마다치 않아
빨래방서 털어놓은 그때 그 사연
‘엄마’‘아내’가 산복도로 지켰다
그 시절 그만큼 고생해서 지금 이만큼 산다고 웃으며 말하는 부연(왼쪽) 씨와 순엽 씨.
산복도로에는 많은 ‘엄마’가 살고 있다. 부산 신발의 전성기를 이끌던 여공 ‘엄마’, 자식을 키우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는 ‘엄마’, 배타는 남편을 기다리며 가족을 지키던 ‘엄마’다. 산복빨래방에 빨랫감을 맡기러, 찾으러 와서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는 어머님들의 옛이야기에 그 시절 힘들고 고됐던 우리 엄마들의 삶이 녹아 있다.
장순엽(70) 어머님의 첫 직장은 고무공장이었다. 당시 나이 28살. 올해 마흔여섯이 된 아들이 6살 때 이 동네 사람 누구나 다니는 고무공장에 첫발을 디뎠다. 전남 광양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한 뒤 부산에 와서 처음 취직한 곳이었다. 그렇게 두 달을 일해서 받은 돈은 한 달에 10만 원 남짓이었다. 옆 미싱 부서 여공들은 같은 시간 일을 하는데 월급은 배로 받았다. “엄마가 점심 때 며칠 못 온다. 혼자 먹고 놀고 있어.” 6살 아들에게 이 말이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을 시작한 이상 많이 벌어야만 했다. 점심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몰래 독학으로 미싱을 익혔고 그렇게 미싱공으로 승진했다.
“엄마, 나 컴퓨터 갖고 싶어” 중학생이 된 아들은 순엽 씨에게 처음 갖고 싶은 물건을 말했다. 당시 순엽 씨가 한 달에 벌던 돈은 40만 원가량이었다. 물론 장사 준비를 위해 아침에 출근해 저녁 늦게 퇴근하는 고된 노동이었다. 점심 장사가 끝나고 짬을 내 아들과 서면 전자상가에서 만났다. 컴퓨터는 160만 원이었다. 4개월치 월급으로 컴퓨터를 사 줬다. 남편은 “왜 저런 걸 사 줘서, 하루 종일 쪼그만 거(컴퓨터)만 들다 보고 있게 하느냐”고 타박했다. 산동네 호천마을에서 컴퓨터 있는 집은 순엽 씨 집이 유일했다. 그때 그 컴퓨터를 선물받았던 아들은 대기업 연구원으로 잘 자랐다.
배부연(66) 어머님은 1981년 산복도로 호천마을에 사는 남편과 결혼식을 올렸다. 7명의 시누, 시동생이 시집 온 부연 씨를 맞이했다. 남편은 3남 5녀의 장남이었다. 요즘 같으면 결혼을 망설였을 법도 했지만 부연 씨는 8남매가 어색하지 않았다. 부연 씨 집은 9남매였다. 마을에 처음 왔을 때 산복도로라 불리는 도로도 없었다. 비포장에 돌이 불뚝불뚝 솟은 길 뿐이었다. 뱃사람인 남편은 부산항에서 출항하면 1~2개월 후 집으로 왔다. 집에는 시동생들과 시어머니뿐이었다.
처음 시집와서 시누이, 시동생 시집 장가 보내고 딸 3명도 모두 출가했지만 아직도 집은 산복도로다. 하지만 산복도로를 떠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살던 산복도로 집이 가장 편안한 보금자리라고 말한다. 남편은 40년째 부연 씨 마음 아플까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난다. 71세 나이지만 일하는 게 좋다며 떠나는 남편의 뒷모습을 수십 년 봤지만 늘 마음이 아프다. 남편이 일을 가고 나면 이제 집에는 혼자다.
“남편이 아무 말 안 하고 바다로 일하러 가는 걸 보면 한편으로 마음이 아파. 좋아해서 하는 일이지만 바다는 항상 위험하잖아. 항상 뒷모습을 보면 맨날 걱정이고 연락 올 때까지 안전하게 잘 있는가 싶지. 딸들도 잘 커 줬고 자식 낳고 사위들이랑 오순도순 사니까 얼마나 고마워. 우리 아저씨도 그렇고 딸도 사위도 그렇고 건강만 하면 좋겠어. 건강이 최고지, 뭐”
엄마이자 아내였던 두 ‘엄마’들의 삶이 우리네 엄마들의 삶과 무엇이 다를까. 그녀들의 삶에서 산복도로를 지탱한 힘들었던 현대사를 엿본다. 위대한 삶에 산복빨래방은 경의를 표한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김보경 harufor@busan.com , 이재화 jhl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