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철로 위에 새긴 망국의 비애와 국권 회복의 열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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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소눌 노상직의 얼을 간직한 경남 밀양시 자암서당 전경. 부산일보DB 소눌 노상직의 얼을 간직한 경남 밀양시 자암서당 전경. 부산일보DB

19세기 철도의 탄생은 혁명이었다. 시공간의 압축을 통해 인간의 삶과 의식, 문화적 양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대한제국기 철도는 근대문명의 경이만은 아니었다. 철도부설권이 일제에 넘어감으로써 식민 지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철로를 둘러싼 갈등도 깊었다. 러일전쟁 당시 철도방해죄로 붙잡힌 의병들은 무참히 총살당했으며, 독수리가 얼굴을 파먹는데도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다. 그만큼 철도는 침략과 수탈을 위한 핵심 시설이었다.

철도는 국망의 비탄을 딛고 나라를 되찾으려는 우국지사들의 열망을 실어 나르기도 했다. 노구를 이끌고 망명길에 올랐던 대눌 노상익, 수파 안효제, 경재 이건승 등은 안동현 접리수촌 서구(西溝)에 터를 잡았다. 안동은 단동의 옛 이름으로 접경지다. 엄혹한 감시 속에서도 강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숱한 애국청년들은 이곳을 거쳐 중국과 러시아로 흩어지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유림들의 서간도 망명은 민족자존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자 고구려 옛터를 기반으로 역사를 잇고자 했던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들이 보여준 의기는 서간도의 매서운 칼바람에도 쉽게 꺼지지 않는 등불이 아니고 무엇이랴.

소눌 노상직의 〈신해기행(辛亥紀行)〉은 밀양 노산을 떠나 안동현 성신태에 이르는 지식인의 고뇌를 담은 한시집이다. 경술국치 이듬해, 한 달 앞서 압록강을 건넌 형 노상익을 뒤따른 망명의 기록이다. 헤진 이불 한 채와 서책 몇 권만을 들고 떠난 형의 행장과 무엇이 달랐으랴. ‘노산을 떠나며(發蘆山)’는 우국충정과 조상에 대한 도리가 충돌하는 마음자리를 곡진하게 표현했다. 시제는 대부분 경부선과 경의선 역이름이다. 밀양역을 출발해 대구, 왜관, 천안, 노량진, 임진강을 거쳐 개성, 사리원, 평양, 신의주를 지나 안동현역에 다다른다.

소눌은 망명지에서 대눌에게 입적한 아들 식용을 잃는다. 신주를 고향에 가져가라는 형의 강권으로 1913년 1월 환국했다. 노산 아래 자암서당을 열고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부지런히 문집을 간행했다. 형제의 우애는 망국의 한만큼이나 도타웠다. 1919년 파리장서에 서명한 일로 고초를 겪기 전까지 접리수촌을 오가며 그리움을 달래고 독립자금을 전달했으리라 여겨진다. 접리수촌 지식인들은 요주의 한인이나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었으며, 망명지에서 유명을 달리한 이가 많았다. 2011년 대눌의 초상화 액자에 숨겨둔 서구결사록(西溝結社錄)이 세상에 드러난 일을 어찌 우연이라 할 수 있으랴. 그날, 검은 연기와 굉음을 토해내며 서간도로 질주하던 기차에서 망명객들이 가슴에 품었을 망국의 비애와 식민 통치를 넘어서려던 의지를 되새긴다. 망명은 종착역이 아니라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출발이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세계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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