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마실 물 한 동이 뜨려고 산꼭대기 절에 오갔지” [산복빨래방] EP 12.
[산복빨래방] EP 12.
산복은 아름다워-영희 씨 이야기
안녕하세요, 산복빨래방입니다. 빨래방을 찾아오신 어머님, 아버님들은 저마다 빨랫감과 함께 이야기를 한 아름 안고 오십니다. 이곳에서 수개월간 세탁비 대신 받은 이야기는 개개인의 삶을 너머 부산의 굽이치는 역사 그 자체였습니다.
단칸방에 7명이 옹기종기 사는 게 흔하던 시절. 빨래방 단골인 이영희(70) 어머님은 가족이 마실 물을 구하기 위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산길 수 킬로미터를 오르내렸습니다. 급할 땐 새벽에 아이를 등에 업은 채 꽁꽁 언 손을 녹이며 공동 우물 앞에서 물을 뜨기 위해 차례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언제든 물을 구할 수 있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부터 들려드릴 건 모든 것이 열악했던 그때 그 시절, 삶을 오롯이 가족에게 헌신했던 한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빨래방 공식 1호 손님인 이영희(70) 어머님은 산복도로에 터를 잡은 지 무려 50년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 군인의 손 편지
1952년 2월 5일,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영희 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홀로 상경했다. 영희 씨는 서울에 있는 고모 집에 살면서 몸이 안 좋은 고모의 생활을 도왔다. 미군 부대에서 일했던 고모부는 형편이 썩 괜찮았고, 종종 달콤한 미제 초콜릿을 건네기도 했다.
그러던 중 영희 씨가 20살이 되던 해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경기도 파주에서 한 군인이 보낸 편지였다. ‘일면식도 없는 군인이 웬 편지람?’ 마침 같은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촌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알고 보니 사연이 참 특이했다. 당시 군부대는 인근 마을의 벼농사를 도와주곤 했는데, 사촌 언니네 집에도 일을 도운 군인이 한 명 있었다. 고마운 마음에 김치도 나눠주고 하다 보니 형부와 술도 한 잔씩 주고 받을 정도로 친해졌다. 사촌 언니는 키가 크고 잘생긴 이 군인을 썩 마음에 들어 했고, 사촌 동생인 영희 씨 주소를 알려주며 중매에 나섰다.
당시 군인이었던 영희 씨 남편은 얼굴도 보지 못했던 영희 씨에게 연애 편지를 써 보냈다. 50년도 넘게 지났지만 영희 씨는 아직도 그때 받은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처음 남편이 보낸 편지를 봤을 때 ‘글씨를 참 잘 쓰네’ ‘공부 좀 잘했는가보다’라고 생각했지. 그래도 내가 키가 작아서 ‘아직 결혼 생각이 없다’고 답장을 보냈더니, 이번에는 자기 사진이랑 같이 편지를 또 보낸 거라. 근데 사진을 보니까 얼마나 잘생겼던지. 거기에 홀딱 반해가지고 한 번 만나보기로 했지.”
영희 씨 남편이 편지에 함께 넣어 보낸 본인 사진 모습.
남편은 영희 씨와 만난 지 6개월 만에 제대했다. 남편은 제대 날 군복을 벗지도 않고 곧장 영희 씨 집으로 찾아왔다. 영희 씨는 그날 바로 군복 입은 남편을 따라 남편의 고향인 경북 의성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왜 그렇게 서둘렀나’라는 질문에 영희 씨는 “몰라. 그때는 서로를 놓칠까 봐 그랬는가 봐. 어린 마음에”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렇게 남편 집에 갔던 영희 씨는 이듬해 봄에 결혼식을 올렸다. 23살의 나이였다.
영희 씨는 남편이 제대한 날 곧장 남편을 따라 경북 의성으로 갔다. 그리고 이듬해 봄,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 핏덩이 업고 부산행
의성에서 농사일을 도왔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게을러서는 아니었다. 수확물은 많았지만 남의 땅을 빌린 게 문제였다. 해마다 도지(남의 논밭을 빌린 대가로 해마다 내는 벼)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영희 씨 표현을 빌리자면 ‘쎄가 빠지게(힘들게) 남 좋은 일’만 하다 보니 농사지은 이듬해에도 먹을 쌀이 부족했다.
영희 씨가 ‘여기 살아서는 평생 남의 농사만 짓다 말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영희 씨는 가족 다 같이 부산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1970년대 당시 부산은 각종 고무공장과 철강회사 등이 생기며 일자리가 많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남편 친척 중 해운대구 재송동 한 제철 공장에 일하는 사람도 있어 도움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영희 씨는 시아버지, 시동생, 남편과 함께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등에는 낳은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딸도 업혀있었다. ‘부산에 가면, 우리만 부지런하면 하다못해 한 달 100원이라도 저축할 수 있지 않겠나’는 마음이었다.
남편은 친척이 일하던 재송동 철강회사에 취업했다. 회사 근처에 부산 첫 집도 마련했다. 하지만 바로 옆에 철도가 있는 게 흠이었다. 기차가 지나갈 때면 집안 물건 중 흔들리지 않는 게 없었다. 결국 영희 씨는 다른 살 곳을 찾았다. 부산에 별다른 연고가 없고, 마땅히 가진 것도 없었던 영희 씨 가족은 그렇게 산복도로로 왔다. “그때만 해도 이곳에서 50년 가까이 살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영희 씨는 부산 산복도로 안창마을에 터를 잡았다. 이곳에서 50년 가까이 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 물 찾아 '산'만리
영희 씨는 산복도로에서 아이 둘을 더 낳았다. 딸 셋을 키웠다. 3년 터울로 계속해서 아이가 태어나다 보니 밖에서 일을 나가기 어려웠다. 집에는 모셔야 할 어른도 있었고, 아이 울음소리는 그칠 날이 없었다. 일하러 떠난 남편 대신 단칸방에 있는 식구 7명의 하루하루를 책임져야 했다.
일곱 식구 살림을 사는 영희 씨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바로 ‘물'이었다. 지금은 산복도로라고 해서 산동네 마을을 이어주는 포장도로가 있지만, 당시에는 흙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있는 집도 대부분 무허가로 지은 판잣집이었다. 제대로 된 수도 시설이 있을 리 없었다. 마을에 몇몇 우물이 있긴 했지만 우물 근처 4~5가구 정도가 자물쇠로 잠가 놓고 자기들만 썼다.
마을 공용 우물이 있긴 했지만 경쟁이 너무 치열했다. “샘에 물이 고일 틈이 없었어. 한 동이 펄만큼 고이면 누가 퍼가고, 또 모이면 누가 퍼가고 하니까 얻을 수가 없는 거야.” 결국 영희 씨는 어둑한 새벽 시간 아이를 등에 업고 우물에 갔다. 혹여나 아이가 추울까 봐 담요로 둘둘 매고, 언 손은 입김으로 녹이며 몇 시간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 동이가 고이면 퍼서 얼른 집으로 달려갔다. 급하게 다시 왔지만, 그새 우물 앞엔 다른 사람이 줄을 서 있곤 했다.
영희 어머님은 처음 부산에 와서 힘들었던 그때 그 시절 '참 힘들었다'고 회상합니다. 물 한 동이를 얻기 위해 산꼭대기 절을 매일 가야 할 정도로 생활 시설이 열악한 때였습니다.
물이 급할 때는 산꼭대기에 있는 절을 찾았다. 지금도 수정산 안창마을에 있는 법천사라는 곳이다. 경사가 워낙 급한 데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별수 없었다. 영희 씨는 스님에게 딱한 사정을 여러 차례 읍소했고, 결국 절에 있는 연못에서 물을 떠 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가족이 마실 물 한 동이, 한 동이 이고지고 날랐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한 달에 한 번씩 마을에 물차가 오기 시작했다. 물차는 말 그대로 마실 수 있는 물을 실은 차였다. 산복도로에 사는 사람은 늘어갔지만 제대로 된 수도시설이 없어 주민에게 물을 나눠주기 위해 왔다. 지금이야 사람들이 명품 산다고 백화점에 ‘오픈런'을 한다지만, 그때는 한 달에 한 번 물차가 오면 동네 사람들이 물을 얻으러 일찍부터 몰려들었다. 나중에 한 주민이 수로를 만든 뒤 마을로 물을 끌어와서 팔기 시작한 뒤부터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
“금이나 쌀이 아무리 귀해도 돈이 있으면 다 살 수 있거든. 근데 물은 돈으로 살 수도 없는 거야. 집에 있는 큰 고무 다라이(대야)에 물을 가득 채워놓으면 어찌나 마음이 좋던지. 그때 물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나는 지금도 물 함부로 안 쓴대이.”
영희 어머님의 초대로 집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오르는 길은 제법 경사졌지만, 수정산이 한 눈에 보이는 탁 트인 전망에 금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 제사, 또 제사
영희 씨네 집에서는 일 년에 열두 번 제사를 지냈다.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제사를 지낸 셈이다. 첫째 아들인 남편에게 시집 오면서 집안의 맏며느리가 됐다. 제사를 모셔야 할 집안 어른이 한둘이 아니었다. 1년에 한 번씩 윗대 조상을 한 번에 모시는 '모사'도 챙겨야 했다. 마을에서도 제사 많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서울에 살 때는 불 한 번 안 때 본 영희 씨지만 결혼 후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집안일을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제사 음식을 준비할 만한 도구가 따로 없어,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그 위에서 전을 구웠다. 음식을 할 때면 뭉게뭉게 피어오른 연기에 눈이 따가워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렀다.
영희 씨는 ‘사는 게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때가 재밌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제사를 지내면 큰 나무가 있는 공터에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옛날에는 먹을 게 귀하잖아. 그러니까 어느 집에서 제사하면 늦은 밤까지 아저씨, 아줌마들이 모여 노는 거야. 그러다 제사가 좀 늦어져서 자정이 넘을라치면 ‘빨리 제사 음식 가져와라’고 성화였지. 그럼 제사 음식을 큰상에 내서 다 같이 먹고 그랬어. 그 정도로 인심이 좋고 재밌었다고.”
영희 씨는 50년 가까이 산복도로에서 살았다. 출가한 세 딸은 틈만 나면 영희 씨에게 편한 곳으로 이사하라고 성화다. 하지만 영희 씨는 산복도로를 떠나지 않는다. 이곳에 와서 가족이 다 잘됐다고 믿기 때문이다. 거실 창문을 열 때마다 보이는 탁 트인 수정산과 산복도로 전경을 사랑해서다. 집 마당에 크는 가지와 단호박을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게 좋다.
영희 어머님은 집앞 마당에서 여러 식물을 직접 키우고 계십니다. 그 중 가지를 가장 좋아하신다고 합니다.
젊은 날에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삶을 쏟아붓느라 정작 밖에 나갈 기회가 없었다. 그게 운명이라고 받아들인 줄 알았는데, 나이가 60세를 넘어가면서부터 자꾸 우울함을 느꼈다. 그때부터 마을 문화센터나 행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또래 친구를 만나 수다도 떨고, 노래도 실컷 부른다. 요새 영희 씨는 놀러 다니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
“남편이 ‘우리가 이제 다니면 얼마나 다니겠노. 다리 아프면 못 다니는데. 젊어서 못 해본 거 이제 마음 놓고 다 해 보고 죽자'라고 하대. 그때 얼매나 뭉클하던지. 글씨 쓰는 것도 배우고 장구 치는 것도 배우고 하면서 요즘 누가 물어보면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 그래. 이곳에서 건강하게만 지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어."
영희 어머님은 <산복빨래방>이 개업한 날 가장 먼저 빨랫감을 가져오셨습니다. ‘어머님, 아버님들이 빨래를 안 맡기면 어떡하지’라는 저희의 걱정을 훌훌 털어주셨습니다. 함께 기장 바다로 고동을 따러 가기도 하고, 텃밭 가꾸기를 도와주시는 등 늘 저희에게 마음 써주시는 고마운 어머님입니다.
가족이 목마름에 괴롭지 않도록 매일 산을 오르내리고, 묵묵히 세 딸을 키워내신 영희 어머님. 산복빨래방은 이영희 어머님의 삶에 경의를 표합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이재화 jhlee@busan.com , 김보경 harufo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