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는 ‘4色 가을’ 달콤하게 익어간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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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분위기 억새 명소 산굼부리에 반하고
용암 원시 숲 곶자왈에선 조용하게 트레킹
가을꽃 화려한 마노르블랑서 커피 한 모금
송악산 둘레길 걸으면서 바람과 함께 춤을

오랜만에 비행기를 타고 남해 바다를 건너 제주에 다녀왔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제주의 가을은 깊어가고 있었다. 아직 덜 익어 파란 감귤에서 흘러나오는 상큼한 냄새는 이곳에서만 맡을 수 있는 가을의 향기였다. 산굼부리 억새, 곶자왈 인공 숲, 마노르블랑 꽃 정원, 송악산 바다 둘레길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가을을 느낄 수 있었다.


제주도 마노르블랑. 제주도 마노르블랑.

■산굼부리 억새

제주에는 억새와 갈대 명소 여러 곳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은 산굼부리다. 봄여름에는 구상나무 길이, 가을에는 억새가 아름다운 곳이다. 그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드라마 ‘가을의 여신’과 영화 ‘연풍연가’ 등이 촬영되기도 했다.

산굼부리 정상으로 올라가는 산책로에는 제주의 자연석이 깔렸고 길을 따라 나무 덱이 설치됐다. 산책로 위아래로는 온통 억새밭이다. 억새밭 곳곳에서 찰칵거리는 휴대폰 사진 소리가 들리더니 하하호호, 즐거운 웃음소리가 이어진다.

아직 덜 ‘익은’ 억새가 많아 밭은 완벽하게 갈색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푸른 잎이 많이 휘날리는 중이다. 10월 중순 이후는 돼야 전체가 갈색으로 뒤덮일 모양이다. 억새밭 사이에 설치된 전망대에 서서 주변이 억새를 둘러본다. 전체가 모두 갈색 억새로 변할 경우 그 분위기는 얼마나 환상적일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짜릿해진다.


제주도 산굼부리. 제주도 산굼부리.

■곶자왈 원시림

곶자왈은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원시 용암 숲이다. 예로부터 야생 동물이 숨어 살던 곳이라고 한다. 테우리길 등 다양한 산책로가 조성된 덕분에 누구나 숲 체험을 할 수 있다.

숲은 열대 우림 같은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지난 봄 미국 괌에 갔을 때 열대 숲 체험을 한 것과 비슷한 기분이 느껴진다. 이색적인 제주에서도 특히 이색적인 공간이다.

숲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다양한 새 소리가 낯선 발걸음을 경계한다. 이곳에서는 귀만 열고 있으면 된다. 입은 전혀 필요 없는 공간이다. 관광객, 현지 주민은 조용히 숲속을 걸을 뿐이다. 새 소리는 물론 바람에 스치는 풀잎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저 터벅터벅 걸음만 옮기면 된다.

나무는 키가 크지 않아 숲 안쪽까지 햇빛이 적당히 들어온다. 덥지도 않고 써늘하지도 않아 걷기에 적당한 기온이다. 가끔 제 자리에서 벗어나 산책로까지 넘어온 넝쿨과 나뭇가지만 잘 피하면 걷는 데 아무런 어려움은 없다.

곶자왈의 하이라이트는 숲 한가운데에 설치된 전망대다. 이곳의 꼭대기 층에 올라가면 숲은 물론 숲 너머로 보이는 한라산, 산방산과 여러 오름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전망대 난간을 붙잡고 잠시 ‘멍 때리기’에 들어간다.

푸른 숲과 파란 하늘, 그 너머로 느긋하게 흘러가는 하얀 구름, 그리고 숲에서 흘러나오는 새 소리와 바람 소리. 시간은 멈춘 것처럼 느껴지지만 구름이 조금씩 움직이는 걸 보면 ‘멍 때리기’와 관계없이 세상은 돌아가는 모양이다.


제주도 곶자왈. 제주도 곶자왈.

■마노르블랑 꽃 정원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제주도까지 가서 굳이 카페에 왜 가는 건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좁은 산길을 굽이굽이 올라가 커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다음 계단을 내려가 카페 아래의 풍경을 내려다보는 순간 그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마노르블랑은 카페가 아니라 산속에 숨은 ‘꽃의 천국’이다. 정원에는 핑크뮬리, 댑싸리, 수국, 팜파스 갈대 등이 천사 같은 미소를 머금은 채 활짝 피어 있다. 정원 곳곳에는 꽃 외에 아직 덜 익은 파란 황금향이 풋풋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뒤편에는 너른 감귤 밭이 펼쳐져 있다. 특이한 모양의 산방산도 이곳의 정원에 핀 꽃을 보고 싶은 것인지 멀리서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목을 길게 뽑고 있다.

마노르블랑 정원을 둘러보려면 입장료를 내거나 커피를 한 잔 사서 마시면 된다. 이렇게 아름답고 넓은 정원을 구경하면서 커피 한 잔 값만 낸다는 게 미안해지기도 한다. 정원을 둘러보고 나오니 한쪽 구석에 각종 묘종을 심은 작은 화분이 보인다. 산속에 꽃의 천국을 일군 게 요행이 아니라 피와 땀이 서린 노력의 결실이라는 걸 알려주는 화분이다.


제주도 마노르블랑. 제주도 마노르블랑.

■송악산 바다 둘레길

제주도 가장 남쪽에 자리를 잡은 송악산은 원래부터 인기가 높은 관광 명소다. 바다를 보면서 제주 올레 10코스의 일부인 둘레길을 걸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높이가 낮아 10분만 걸으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형제섬과 가파도, 마라도까지 볼 수 있다.

송악산 둘레길의 가을이 특별한 것은 억새 덕분이다. 둘레길을 따라 바다 쪽 절벽을 억새가 뒤덮어 독특한 가을 분위기를 연출한다. 제주에는 바람이 많다고 하는데 송악산 둘레길의 바람은 특히 세기로 유명하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는 억새를 바라보면 마치 갈색 파도가 일렁이는 착각을 할지도 모른다.

송악산 둘레길에서도 멀리 산방산을 볼 수 있다. 바람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억새와 푸른 파도, 그리고 자그마한 어촌 마을과 그 너머의 산방산은 꽤 절묘한 가을 분위기를 연출한다.

돌아오는 길에는 최남단해안로를 따라 차를 모는 것도 괜찮다. 하모해수욕장~운진항~모슬포항을 따라 왼쪽으로 바다를 보면서 천천히 달릴 수 있는 상큼한 코스다.


제주도 송악산 둘레길. 제주도 송악산 둘레길.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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