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정치의 실종과 정치의 가출
진시원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정치 판단 결정권 법원에 떠넘겨
대통령·야당 대표 사법 리스크 덫
‘정치 검찰’이 정부 핵심 권력 장악
언론 공정성 상실하고 갈등 조장
국가 공동체 길 잃고, 국민 삶 팍팍
정당·정치인 하루빨리 정치 복원해야
현재 우리나라는 정치의 실종을 경험하고 있다. 정치가 자진해서 가출한 것이다. 정치가 가출하고 실종되면서 대한민국 공동체는 목적지를 상실하고 좌표 없이 표류하고 있다. 정치는 공동체 구성원 간의 차이를 드러내고 조정하여 최종 결정을 내리는 일이다. 그런데 정치가 이런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면서 정치권이 아닌 다른 주체들이 정치를 행하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는 ‘정치의 사법화’와 ‘정치의 언론화’ 그리고 ‘정치의 검찰화’로 표출되고 있다.
먼저 ‘정치의 사법화’는 정치가 차이의 표출과 조정과 최종 결정이라는 자신의 고유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사법부에 갈등 조정과 최종결정을 떠넘기는 현상을 의미한다. 우리 정치가 사법화된 지는 오래된 일이고 정치의 사법화는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니다. 하지만 정치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면서 발생하는 차이와 갈등의 증폭과 악화는 온전히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정치인들의 책임이자 무능의 결과다. 예컨대, 지금 여당 국민의힘은 대통령과 윤핵관, 그리고 이준석 전 대표 간에 감정싸움과 권력 투쟁을 스스로 정치로 해결하지 못하고 법원에 최종 결정을 맡기고 있다.
또 대통령과 야당 대표는 서로 사법 리스크라는 덫의 악순환에 빠져 있다. 대통령과 부인 그리고 야당 대표와 부인을 둘러싼 상호 고소와 고발전은 전형적인 정치의 사법화 사례다. 정치의 꽃인 정치인과 대의정치 전담 기관인 정당이 스스로 정치를 파기한 것은 사람으로 치면 스스로 숨쉬기를 포기한 것과 같다. 정치의 사법화는 정치권의 비정상적인 책임 방기이고 무책임한 직무 유기다.
‘정치의 언론화’는 정치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면서 언론이 정치의 역할을 대신하는 현상이다. 언론이 정치권 대신에 공동체의 차이와 갈등을 찾아서 표출하고 조정하고 최종 결정까지 내리는 현상이 바로 정치의 언론화이다. 몇몇 언론사와 유튜버는 국가 공동체의 주요 이슈를 스스로 설정하고 여론을 주도해서 주요 정책 결정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언론이 사실 전달 기능에 우선적으로 충실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 확대에 치중하면서 사실상의 정치를 하고 있는 현상이 바로 정치의 언론화이다. 언론이 공정을 상실하고 오히려 편파적으로 차이와 갈등을 조장하면서 한국 정치의 실종과 악화를 부채질하고 있다.
‘정치의 검찰화’는 검찰이 정치를 주도하는 현상이다. 검찰이 선택적으로 수사하고 기소하고 피의사실을 일방적으로 언론에 유출하여 여론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조성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현상이 바로 정치의 검찰화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의 검찰화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정치권이 아닌 검찰이 정치를 주도하면서 정치권이 검찰에 끌려다니고 정치 검찰이 득세하는 비정상적인 정치가 자리 잡은 것이다. 묵묵하게 범죄자들을 처벌하고 법적 정의를 실현하는 정상적인 검사들과 달리 정치 검사들은 정치의 검찰화를 자신의 사익을 위해 주도한다. 지금 대통령과 대통령실, 그리고 정부의 핵심 권력 부처는 정치 검찰이 장악하고 있다. 검찰 공화국 혹은 검찰 왕국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이유다.
정치의 사법화와 정치의 언론화, 정치의 검찰화는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의 정치다. 우리 정당과 정치인들은 반드시 그리고 하루빨리 정치를 복원하고 정상화해야 한다. 정치와 정치인과 정당은 차이와 갈등을 표출하고 조정하고 최종 결정을 내리는 일에 다시 돌아와 매진해야 한다. 더 이상 사법부나 언론이나 검찰이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방치해서는 안 된다.
정치가 본래적인 기능을 상실하면 국가 공동체는 길을 잃고 국민들의 삶은 팍팍해진다. 그리고 정치가 갈등 조정과 최종 결정에서 주체성과 주도력을 상실하는 순간 사법부와 언론과 검찰이 비정상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주도하게 된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지 사법 공화국, 언론 공화국, 검찰 공화국이 아니다. 정치를 복원하고 집 나간 정치를 다시 데려와야 한다. 지금은 그 무엇보다 정치를 살려야 할 때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를 평등한 구성원들이 서로의 의견과 행동을 교환하는 공간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정치가 기본적으로 공동체 구성원 간의 차이를 드러내고 조정하고 최종 결정하는 일이지만, 그 정치는 평등한 구성원들로 유지되는 공간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국민들 간의 평등성이 확보되어야 제대로 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인과 사법부, 언론사, 검찰의 특권과 우월적인 지위는 이제 국민 모두의 동등성의 이름으로 개선되어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