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안토니오 이노키

강윤경 기자 kyk9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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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프로레슬링은 민족 스포츠라 불릴 정도로 국민적 인기를 누렸다. 프로레슬링이 TV 중계되던 날이면 동네 만화 가게나 TV 있는 집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온 국민을 흑백 TV 앞으로 불러 모았고 식민 지배와 전쟁의 아픈 기억, 가난한 삶의 시름을 잊게 해 주었다. 앞서 일본에서 프로레슬링 붐이 일었다. 전후 일본 사회에서 프로레슬링은 패전의 아픔을 달래며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그 시절 한국과 일본의 프로레슬링 전성기를 주도했던 인물이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키였다. 두 사람은 재일 교포였던 일본 프로레슬링 전설 역도산의 제자로 인연을 맺었다. 김일은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역도산 문하에 들어갔고 이노키는 브라질에 이민해 살던 그를 역도산이 발탁했다. 이들의 첫 대결은 1960년 9월 30일 일본 도쿄에서였다. 이노키의 데뷔전이었는데 당시 김일의 나이가 31세, 이노키는 17세였다. 열네 살 차이였던 이들은 15년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38번의 라이벌전을 가졌다. 김일의 박치기와 이노키의 코브라트위스트 기술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은퇴 후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 생활을 하며 불우한 노년을 보내다 2006년 타계한 김일과 달리 이노키는 레슬링 선수에서 정치인으로 변신을 거듭하며 주목받는 삶을 살았다. 이노키는 1976년 당대 최강의 복싱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와 세기의 대결을 벌였다. 그러나 경기 내용은 실망스러웠고 알리는 ‘창녀와 이노키는 누워서 돈을 번다는 점에서 똑같다’는 독설을 날리기도 했다. 이후 세기의 대결이 레슬링의 주요 기술을 금지하는 이면 합의 때문에 맥빠진 경기가 됐다는 평가가 전해지기도 했다. 이노키는 은퇴 후 1989년 일본평화당을 창당해 참의원에 당선되는 등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스승 역도산의 고향인 북한과의 교류를 통해 친북 인사로 변신해 국내에서도 관심을 받았다. 1995년 처음으로 평양에서 레슬링 대회를 열었고 북한 고위층과 회담하는 등 북·일 관계 개선에도 의욕을 보였다.

이노키가 1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9세. 단백질이 특정 조직이나 장기에 쏠려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아밀로이드종이라는 희귀질환으로 고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투병 중에도 트레이드마크인 붉은색 스카프를 목에 두른 채 나타나 투혼을 보였다. 사각의 링 안에서 온몸을 던져 상실감에 빠진 이들을 위로했던 영웅들이 이제 하나둘 세상을 떠나며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


강윤경 기자 kyk9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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