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의 생각의 빛] 산복도로 그늘로 들어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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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정면은 보이지 않은 채 비스듬히 누워
‘오늘’의 꽁무니를 간신히 붙잡고 있는 곳
떠나고 나니 그 진면목이 보이는구나

밤이 내려앉아 어둑어둑해진 산복도로 들목에 자리 잡은 장례식장에 간다. 갑작스러운 부고에 옷차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로 문상을 하고선 저녁을 먹는다. 낯익은 얼굴들과, 그런 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란스러움과 침묵들이 상기된 이미지로 모여 있는 풍경을 본다. 이곳 산복도로 둘레에선 다른 곳에서는 만나 볼 수 없는 그림들이 박혀 있다. 물론 사람들이 사는 곳이야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유독 이곳만큼은 삶과 죽음 사이에 걸친 모든 시공간의 귀퉁이까지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이곳에서 몇 년 동안 살아 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장례식장 입구에 맥락 없이 들앉은 듯한 버스정류장 벤치에 지팡이를 짚고선 멍하니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본다. 버스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간혹 지나가는 사람을 유심히 쳐다보기도 하고, 혼잣말로 누구를 욕하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섰다 지나가고, 아이를 보듬은 아주머니가 버스 시간을 확인하는 사이 경적을 건방지게 울리며 쏜살같이 사라지는 오토바이가 긁은 흔적에서는 아지랑이가 매캐하게 피어오른다.


덜렁거리며 곧 떨어질 것만 같은 상점 간판 모퉁이와, 삼거리인지 사거리인지 엇비슷하게 서로 각도를 달리한 채 바다며 산으로 뻗어 있는 도로 칸칸이 빛바랜 횡단보도들이 누워 있다. 사람들과 집들과 건물들이 어딘가 모르게 엎드려 있는 것만 같은 이곳은 삶이라는 얼굴의 뒤통수이다. 정면을 보여 주지 않고, 정면에서 비스듬히 모로 누운 채로 끈질기게 생명을 붙들고 있는 그늘 같은 곳이 산복도로다.

강영환 시인은 한 산문에서 “내가 아는 산복도로는 노면이 늘 패여 있었다”(〈작가와 사회〉 2014년 봄호)고 했다. 이곳은 ‘현재’가 아니라 늘 몇 발짝 뒤처진 채 오늘의 꽁무니를 잡고선 간신히 뒤따라오고 있는 ‘지나간’ 현재다. 그렇기에 왠지 고개를 돌리고만 싶어진다. 마주 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진작에 거쳤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미 거쳤다고 여긴 모든 것들이 밀리고 밀리면서 쌓여 지층처럼 산허리쯤에까지 뻗쳐 있다.

한복판에 당당히 서지 못하고 늘 주변 자리에만 서성이다 시간이 다하면 액자에 끼워진 사진으로만 남는 것들이 이곳에 있다. 시인이 죽고 사진만 남은 장례식장에 앉아 생각에 든다. 시인을 생각한 듯하지만, 나는 시인이 아니라 시인이 걸으면서 만났을 길과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 길과 사람들을 스쳐 갔던 모든 존재들을 되살려 보려 했지만 산산이 부서진 조각들 몇 개만 이파리처럼 머릿속을 흔든다. 몇몇 안부들이 빗발치는 화살처럼 장례식장을 메운다. 시인은 조용했고, 그가 썼던 시편들도 모나지 않고 얌전했다. 바람이라도 불면 자빠질 듯 위태로운 발걸음으로 용두산공원을 지나, 성당을 스쳐 이윽고 도착한 주점에서 물 한 모금 들이켜던 시인을 생각한다.

시인은 생전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래서 시인을 아는 사람들은 안다. 시인은 화를 낸 적이 없다. 아니, 화를 내지 않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산복도로도 사심이 없는 채로 ‘오늘’의 꽁무니를 간신히 잡고서는 오늘처럼 행세를 한다. 시인은 천천히 시를 썼다. 시를 쓰고는 물 한 모금 마시고, 물 한 모금 마시고는 신발을 고쳐 맸을 것이다. 그 신발은 산복도로가 내어 준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시인은 두리번거리면서 걸었지만 한 곳만 바라보았다. 시든 삶이든 일관된 표정이 좋다. 산복도로도 일관되게 ‘오늘’을 따라잡지 못한다. 언제나 비스듬히 자빠져 있는 그늘만 보여 주는 곳이 산복도로다.

시인을 생각하면서 산복도로도 데리고 왔다. 산복도로는 지금까지 늘 ‘대상’이 되어 왔다. 시인을 평하던 사람들도 시인이 늘 보여 줬던 행색과 한결같은 분위기만 보았을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시인이 가고 없는 자리에서야 비로소 시인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산복도로를 떠난 자리에서야 비로소 산복도로를 생각했다. 사람이 내게서 떠나가고, 또한 내가 장소를 벗어나니 비로소 사람과 장소가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내게서 떠난 사람과 내가 뜬 장소의 이미지는 마치 당시처럼 머릿속에 붙박여 있다. 그래서 온전히 내 것일 수 없는 사람과 장소지만, 그 사람과 장소는 분명 나를 억세게 품었을 것이다.

대상을 오랫동안 생각하면 당시에는 내보이지 않았던 대상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구를 떠나보내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긴 다음에서야 생각 속으로 그들을 끌어들인다. 그러면 그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에서는 지금의 면목을 보지 못한다. 한 발 뒤로 물러서고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고, 그러한 보임이 마침내 ‘사실’로서 종이에 기록되는 것이다. 시인과 산복도로가 내게 일으켜 세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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