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가족이라는 굴레
‘법은 문지방을 넘지 않는다’고 했다. 고대 로마법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진 이 말은 국가가 가정사에는 일일이 관여하지 않아도 가족 내에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오래된 법 개념이다. 우리 형법 제328조는 직계혈족, 배우자, 동거친족, 동거가족 또는 그 배우자 간에 일어난 절도, 사기, 공갈, 횡령, 배임, 권리행사방해, 장물 등 재산 범죄에 대해 그 형을 면제한다. 그 외 친족 간에는 고소가 있어야 공소를 제기할 수 있다. 여기서 친족은 8촌 이내 혈족과 4촌 이내 인척, 배우자를 말한다. 이름하여 친족상도례 규정이다. 한자어로 풀이하면 친족(親族) 사이(相) 재산 범죄(盜)에 관한 특례(例)를 뜻한다.
자녀가 부모의 지갑에 몰래 손을 댔다고 형벌로는 다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의 돈을 자신의 소비 생활에 몰래 쓸 수도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세뱃돈을 맡겼는데 나중에 부모님이 돌려주지 않아도 그토록 당당했던 것이 친족상도례 덕분이다. 주머닛돈이 쌈짓돈이라는 말도 이에 딱 맞는 속담이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가족 관계도 변해 친족상도례도 곳곳에서 금이 가고 있다. 노부모 재산을 탕진하면서 정작 돌보지는 않는 자식들이 생겼다. 어린 아동이나 지적 장애인을 돌보는 척하며 뒤로 돈을 빼돌리는 나쁜 친척은 드라마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방송인 박수홍 씨 친형의 출연료 횡령 사건으로 친족상도례 존폐 논쟁이 다시 뜨겁다. 박 씨의 친형이 지난 7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혐의로 구속기소되는 과정에서 박 씨의 부친이 돈을 횡령한 건 본인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횡령 주체가 박 씨의 형이 아니라 부친일 경우 직계혈족으로 고소와 관계없이 형을 면제받을 수 있어 논란이 된 것이다. 최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무부 국감에서도 더불어민주당 박범계 의원이 “친족상도례 검토하고 있나”고 묻자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지금 사회에선 그대로 적용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며 개정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친족상도례는 1953년 형법과 함께 제정돼 70년 가까이 흘렀다. 농경시대 대가족제도에서나 어울릴 법을 시대에 맞게 고쳐야 한다는 것이 대체적 여론이다. 가족의 이름으로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전면 폐지는 안 된다는 반론도 있다. 반의사불벌죄나 친고죄 등으로 피해자의 선택권을 넓히자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어찌됐건 돈 앞에서 무너지는 가족 간 사랑은 가슴 아프다.
강윤경 기자 kyk9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