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명품 브랜드, 파리엑스포가 키웠다
루이뷔통, 방수기능 트렁크 첫선
에르메스도 마구용품으로 주목
코카콜라는 미국 엑스포가 은인
매번 새 제품 선보이며 명성 키워
1933년 시카고 엑스포 코카콜라 행사장에 가득 찬 관람객들. 당시 월드엑스포 행사장에서는 코카콜라를 손에 들지 않은 관람객을 찾기 힘들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코카콜라 홈페이지
월드엑스포를 성공적으로 유치하려면 부산·울산·경남은 물론 전 국민이 부산엑스포 개최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엑스포의 역사에 얽힌 흥미롭고 놀라운 이야기를 하나하나 알아가면, 대한민국이 왜 엑스포 유치에 ‘올인’해야 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1860년대 루이뷔통 캔버스 트렁크. 루이뷔통 홈페이지
■루이뷔통·에르메스 키운 엑스포
10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5년마다 열리는 등록엑스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국내외 기업에 더없는 기회의 장이다. 세계 고가 브랜드 업계를 호령하는 ‘루이뷔통’ 역시 엑스포를 통해 성장한 업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821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루이 뷔통은 목수인 아버지로부터 기술을 배우다가 파리행을 결심했다. 가방 장인 마르샤의 견습공이 된 루이 뷔통은 나폴레옹 3세의 아내인 유제니 황후가 총애하는 장인으로 성장했다.
1854년 자신의 이름으로 가게를 낸 그는 마차에서 기차로 교통수단이 변화하는 상황에 주목했다. 기차 증기가 스며들어 드레스 등이 상하지 않도록 방수 가공을 한 캔버스 천으로 가방을 만들어 상류층의 호평을 얻었다.
1867년 파리엑스포를 통해 루이뷔통은 트렁크를 세계 무대에 선보였고, 5만여 상품 가운데 동메달을 받는 성과를 거뒀다. 22년 뒤 1889년 파리엑스포에서는 수납용 서랍과 옷걸이가 달린 의상 트렁크로 금메달을 받았다. 덕분에 루이뷔통이라는 이름이 더 널리 알려졌다. 1900년 파리엑스포에서도 회전목마 형태의 전시 부스를 마련하고, 가죽제품 시리즈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루이뷔통은 100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2010년 상하이 엑스포에서 ‘1867년 파리에서 2010년 상하이까지’를 주제로 특별회고전을 열기도 했다. 그렇게 엑스포로 성장한 루이뷔통은 한 해에 대략 18조 50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글로벌 명품 브랜드가 됐다.
명품 에르메스를 탄생시킨 티에리 에르메스 역시 엑스포에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는 1837년 공방을 열고 마구용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최고의 품질을 지향하는 그의 철학이 담긴 제품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프랑스 최초로 열린 1855년 파리 엑스포가 기회였다. 수제 마구용품을 출품해 1위를 차지했고, 1867년 파리 엑스포에서도 마구용품과 안장 장식품을 출품해 다시 1등상을 거머쥐었다.
1914년 에르메스의 손자 에밀 모리스가 가업을 이어받으면서 혁신이 시작됐다. 모리스는 기차 여행에 어울리는 패션 소품으로 눈을 돌렸다.
1922년 미국 군용차 후드의 개폐장치로 쓰인 지퍼 독점권을 얻은 에르메스는 이를 가방 제품에 적용했으며, 말 안장에 사용하던 박음질을 가방에 도입해 큰 인기를 얻었다. 이후 벨트나 장갑, 옷, 손목시계 등으로 영역을 확장해 오늘날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1933년 시카고 엑스포에 등장한 최초의 콜라 자판기. 코카콜라 홈페이지
■‘역대급 히트’ 코카콜라 품은 엑스포
올해로 탄생 136주년을 맞은 코카콜라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르는 이가 없는 최고의 히트 상품이다.
요즘은 웰빙 트렌드 속에서 다소 주춤한 모습이지만, 200여 개 나라에서 매일 10억 잔 이상의 다양한 음료를 팔아치우는 최대 음료 제조사이기도 하다. 이런 ‘마케팅의 귀재’ 코카콜라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월드엑스포가 자리 잡고 있다.
1886년 미국 애틀란타의 약사 존 펨버턴이 두통약을 개발하다가 코카콜라 원액을 만들어 낸 것은 이미 익숙한 이야기다. 그는 2년 뒤 사업가 캔들러에게 코카콜라를 매각했다. 캔들러는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 코카콜라를 출품해 본격적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이어 1904년 세인트루이스, 1909년 시애틀, 1915년 샌프란시스코 엑스포에 잇따라 참가하면서 코카콜라는 엑스포 공식 음료처럼 여겨지게 된다.
1923년 캔들러는 어니스트 우드러프에게 회사를 매각했다. 우드러프의 아들 로버트 우드러프가 경영 일선에 나서면서 코카콜라는 다시 한 번 변화의 계기를 맞이한다.
올림픽과 월드컵 후원으로 ‘마케팅 천재’라는 별칭을 얻게 된 그는 1933년 시카고 엑스포에서 판매원이 없는 최초의 자동판매기를 선보여 눈길을 사로잡았다. 손잡이를 누르면 생맥주가 나오는 것처럼, 원액과 탄산수가 섞인 코카콜라가 나오는 방식이었다. 시카고 엑스포가 열린 6개월 동안 650만 개 이상의 콜라가 팔려나갔다.
코카콜라는 비수기인 겨울 판매량을 늘리려고 코카콜라 제품 이미지와 같은 빨간색과 하얀색 옷을 입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탄생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코카콜라는 이후 열린 엑스포마다 대대적인 광고 마케팅으로 승부를 걸었다.
1958년 브뤼셀 엑스포에 참가한 이후 새로운 브랜드인 환타와 스프라이트를 선보였고, 1964년 뉴욕 엑스포에서는 관람객들이 인도와 홍콩, 독일, 브라질 등 세계 각국을 가상으로 여행하게 하는 기발한 전시관을 마련했다. 당시 코카콜라관 정원에는 높이 37m의 탑을 세워 엑스포 전시장에 시간을 알려주고 음악을 내보냈다.
1968년 텍사스 샌안토니오 엑스포의 코카콜라관에서는 꼭두각시 인형극을 소개했으며, 1982년 녹스빌 엑스포에서는 ‘체리 코크’를 세계에 처음 선보였다.
대한민국 여수와 러시아 모스크바가 고배를 마시게 한 2010 월드엑스포의 주인공은 중국 상하이였다. 이때 코카콜라는 상하이를 공개적으로 지원하면서 중국에 대규모 투자와 생산을 선언했다. 거대한 중국 시장을 위해 다양한 캠페인과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2015년 밀라노 엑스포에서도 코카콜라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자연에서 썩는 친환경 식물성 소재로 만든 콜라병 ‘플랜트 보틀(Plant Bottle)’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이처럼 엑스포는 새롭고 다채로운 식품을 세계 시장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실제 1893년 시카고 엑스포에서 브라우니와 팬케이크 믹스가 등장했고, 1904년 세인트루이스 엑스포에서는 햄버거와 핫도그, 와플콘 아이스크림, 솜사탕, 땅콩버터 등 지금은 익숙한 음식들이 등장해 세계로 퍼져 나갔다.
2030 부산월드엑스포 유치에 성공해 부산어묵과 씨앗호떡, 밀면, 돼지국밥과 같은 부산 음식과 K푸드가 더 널리 세계에 알려지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흐뭇한 일이다.
박세익 기자 ru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