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파크의 원조 디즈니랜드, 뿌리는 시카고엑스포

박세익 기자 r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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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부친, 전시장 공사 참여
미키마우스도 엑스포에서 첫선
에펠탑 탄생 주역은 파리엑스포
오티스·에디슨 인기에도 한몫

2010년 상하이 엑스포 이후 2016년 공식 개장한 상하이 디즈니랜드는 파리, 도쿄, 홍콩에 이은 네 번째 미국 밖 디즈니랜드다. 1889년 파리 엑스포를 위해 건설된 에펠탑 주변 마르스광장 등을 기록한 그림(아래)에서 다양한 전시관 건물을 볼 수 있다. 부산일보DB·에펠탑 홈페이지 2010년 상하이 엑스포 이후 2016년 공식 개장한 상하이 디즈니랜드는 파리, 도쿄, 홍콩에 이은 네 번째 미국 밖 디즈니랜드다. 1889년 파리 엑스포를 위해 건설된 에펠탑 주변 마르스광장 등을 기록한 그림(아래)에서 다양한 전시관 건물을 볼 수 있다. 부산일보DB·에펠탑 홈페이지

오랜 역사 속에 테마파크의 제왕으로 여겨지는 디즈니랜드는 여전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평생 한 번은 가보고 싶은 꿈의 공간이다.

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세계 유명 도시의 랜드마크’를 묻는다면, 곧장 ‘파리 에펠탑’이라 답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에펠탑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은 프랑스 여행 증명서나 마찬가지다.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이런 ‘글로벌 핫 플레이스’들을 키워 낸 숨은 조력자가 바로 월드엑스포였다.


■ 엑스포로 성장한 디즈니랜드

세계 대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크고 작은 놀이동산. 요즘 말로 ‘테마파크’는 150년 전 열린 월드엑스포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특히 엑스포와 월트 디즈니의 인연은 남달랐다. 디즈니의 아버지는 1893년 시카고 엑스포 전시장을 지은 노동자였다. 1901년에 시카고에서 태어난 월트 디즈니에게 엑스포는 친숙하고 가슴 뛰는 이벤트였다.

할리우드에서 창업한 디즈니는 1928년 대표 캐릭터 미키마우스를 탄생시켰다. 1933년 시카고 엑스포가 다시 열렸을 때 미키마우스가 새겨진 상품을 처음으로 전시했다. 이후 1939년 뉴욕 엑스포의 놀이동산과 쇼 형식의 화려한 무대들은 디즈니에게 영감을 줬다.

애니메이션 등 영상 콘텐츠로 성공을 거둔 디즈니는 1955년 비판과 호평 속에서 미국 LA 인근에 디즈니랜드를 개장했다. 그는 1958년 브뤼셀엑스포 때 본격적으로 엑스포에 참여한다. 당시 미국관에서는 디즈니의 ‘아름다운 미국’이라는 360도 스크린 영상이 인기를 끌었다. 엑스포가 끝난 뒤에도 디즈니랜드에서 영상을 볼 수 있었다.

1964년 뉴욕에서 엑스포가 열렸다. 2년 연속 개최를 고집한 탓에 국제박람회기구(BIE)의 공인을 받지는 못했지만, 500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찾을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그 뒤에는 월트 디즈니가 있었다. 당시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도 뉴욕 엑스포를 참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디즈니는 뉴욕 엑스포에서 ‘작은 세상(It‘s a Small World)’을 처음 선보였다. 펩시가 후원한 유니세프 전시관을 찾는 어린이를 위한 것이었다. ‘작은 세상’의 주제를 담은 동요가 큰 인기였는데, 유니세프의 요청으로 저작권을 신청하지 않아 금방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뉴욕 엑스포 기간 동안 1000만 명이 ‘작은 세상’을 관람한 것으로 집계됐다. 작은 배를 타고 인형들이 표현하는 다양한 세계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이 전시관은 전 세계 디즈니랜드나 디즈니월드에서 지금도 운영 중이다.

디즈니는 또 뉴욕 엑스포 제너럴 일렉트릭 전시관의 회전식 극장에서 로봇이 움직이는 월트디즈니쇼를, 일리노이주 전시관에서 링컨과 똑같은 모습으로 연설하는 ‘링컨 로봇’을 선보여 호평을 얻었다. 포드 전시관에선 디즈니의 창의성이 빛나는 ‘매직 스카이웨이’를 만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디즈니는 한국 여수시를 제치고 열린 2010년 상하이 엑스포와도 인연을 맺는다. 2009년 중국 정부가 상하이 디즈니랜드 건설을 승인하자, 오바마 대통령은 이에 대한 답으로 미국의 불참 결정을 뒤집고 상하이 엑스포 참가를 발표했다. 엑스포와 디즈니랜드 유치를 간절하게 희망했던 상하이는 결국 꿈을 이뤘고, ‘포스트 엑스포’ 프로젝트로 디즈니랜드 건설을 이어가며 도시 성장의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디즈니는 6조 2000억 원 규모의 상하이 디즈니랜드를 2016년 개장했다.

엑스포를 성장의 기회로 십분 활용한 디즈니처럼, 2030 부산엑스포 유치는 K팝과 한류로 대표되는 한국인의 흥과 멋을 제대로 버무려 세계인의 축제로 이끌어 내느냐에 성패가 달렸다.

■ 에펠탑 탄생시킨 월드엑스포

에펠탑도 사실 월드엑스포가 없었다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다. 엑스포가 남긴 상징물이 개최 도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주는 대표 사례가 바로 에펠탑이다.

1884년. 파리의 네 번째 엑스포인 ‘1889년 파리 엑스포’ 개최가 결정됐다. 조직위원회는 프랑스 혁명 100주년에 열리는 엑스포를 상징하는 기념물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고, 설계안을 공모했다. 응모작은 무려 700점이 넘었다.

1886년 5월 심사위원회는 9개의 최종 후보 중 구스타프 에펠의 철탑을 선정했다. 철도 엔지니어이자 교량 등 금속 구조물 설계로 유명했던 에펠의 작품은 프랑스의 철강 생산력과 기술력을 세계에 드러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공모에 당선된 에펠탑은 에펠의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게 정설이다. 그가 설립한 회사의 엔지니어와 건축가들이 낸 설계안을 사들여 자신의 명의로 지적재산권을 갖게 됐다.

당시 높이 300m에 달하는 철탑을 박람회장에 솟구치게 하려면 큰돈이 필요했다. 엑스포 조직위는 전체 비용의 25%가량인 150만 프랑만 주고 나머지는 에펠이 조달하기로 합의했다. 대신 에펠은 20년간 에펠탑 운영권을 가지게 됐다. 결과적으로 에펠은 현명한 선택을 했다. 불과 5년 만에 투자한 건축비를 모두 회수한 뒤 엄청난 수익을 챙겼기 때문이다.

에펠탑이 완성되자 세계인들이 엑스포를 참관하려고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지금은 흔한 시설인 미국 오티스사의 엘리베이터도 한몫했다. 에펠탑 엘리베이터 7대 중 4대가 오티스 엘리베이터였다. 1853년 뉴욕 엑스포에서 처음 선보인 오티스 엘리베이터는 가장 안전한 엘리베이터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1878년과 1889년 파리 엑스포에서 에디슨의 전기도 큰 인기를 끌었는데, 에펠탑에 전구를 달아 엑스포장과 밤하늘을 화려하게 밝힌 야간 조명이 널리 입소문을 탔다. 에펠탑은 1900년 파리 엑스포 때에도 상징 시설로 활용됐고, 이후 라디오 송신탑 기능도 갖게 됐다.

에펠탑 프로젝트의 모든 과정이 순조로운 건 아니었다. 거대한 철 구조물이 무너져 주변을 덮칠지 모른다는 시민들의 공포감과 흉측한 철 구조물로 예술의 도시 파리를 망친다는 문화계의 저항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주거 환경 파괴를 우려하는 시민 소송도 제기됐다.

이에 에펠은 탑이 무너지면 책임을 지고 손해배상을 하겠다는 성명까지 발표했다. 문화계에서는 작가 모파상 등 파리의 예술인 300인 위원회가 구성돼 거센 반대 운동이 진행됐다. 이들은 에펠탑을 ‘흉측한 새장’ ‘깡통 기둥’이라 비하하며 에펠을 압박했고, 결국 운영권이 만료되는 20년 뒤 철거를 약속했다. ‘에펠탑 혐오’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모파상은 에펠탑이 완공되자 에펠탑을 볼 수 없는 유일한 장소인 에펠탑에서 점심을 먹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9000t에 달하는 에펠탑이 25개월간 천신만고 끝에 완공되자 저항은 점차 찬사로 바뀌어 갔다. 높이 320m, 철골구조물 무게만 7100t이 넘고, 1652개의 계단이 놓인 에펠탑이 파리 한가운데 우뚝 서자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엑스포 기간 중 입장객이 200만 명을 훌쩍 넘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고, 문화의 아이콘이자 엑스포가 남긴 인류 최고의 유산이라는 쪽으로 여론이 급선회했다. 이후 철거 계획도 사라지고, 에펠탑 영구 보존이 결정됐다. 미국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건설된 1931년까지 에펠탑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도 이름을 떨쳤다.


박세익 기자 r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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