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낙동강’과 부산의 예술인들
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1952년 상영한 영화 ‘낙동강’ 신문 광고. 부산일보DB
한국전쟁은 냉전 세력이 한반도에서 벌인 국제전이다. 사상전이자 심리전이었던 만큼 정훈활동이 중요했다. 국방부 정훈국과 미국공보원에서는 ‘국방뉴스’와 ‘리버티뉴스’, ‘백만인의 별’과 같은 보도 영상 제작에 열을 올렸다. 부산·경남 지역 문화예술인들도 이러한 흐름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여 영화를 제작했다. 정진업 각본 신경균 연출의 ‘삼천만의 꽃다발’, 경상남도 공보과에서 제작한 ‘마음의 등불’, 향토문화연구회의 ‘낙동강’이 바로 그것이다.
‘낙동강’은 1951년 말 완성하여 1952년 2월 14일 문화극장 시사회를 거쳐 2월 23일 부민관에서 개봉했다. 기획은 한강과 우신출, 제작은 김재문의 무명영화연구소가 맡았다. 이를 주도한 단체는 경남지사 양성봉과 도청 고위공무원들을 중심으로 지역 문화예술인이 결합한 향토문화연구회다. 초기 구성원은 화가 우신출, 사진가 김재문, 음악가 금수현이다. 해방기 김재문은 무명사진관을 운영했으며, 우신출은 경상남도 학무과 문화계장으로 일했다. 두 사람은 문총 종군화가단에 가입하여 원산까지 종군했다.
이 영화는 “트럭 한 대를 빌어” 촬영했을 만큼 제작 환경이 열악했는데도 낙동강 중류 지역 안동 도산서원과 선산 도리사를 거쳐 하류 지역 삼랑진과 을숙도의 풍광과 문화를 오롯이 담았다. 제작 기간이 3개월에 불과했지만, 진해 대한합동영화촬영소의 후반작업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윤이상 작곡의 영화음악은 임원식 지휘로 낙동관현악단이 연주했다. 당시 임원식이 육군교향악단 객원지휘자였다는 점에서 육군교향악단을 기반으로 영화음악 녹음을 위해 임시로 조직한 연주단체로 보인다. 육군교향악단은 김학성의 부산관현악단과 결합한 단체이므로 부산지역 연고성이 깊다. 김해 출신 김호민이 합창단 지휘를 맡았다. 동양음악학교를 졸업한 “탄력 있고 극적인 테너”로, 금수현에 이어 경남음악교육연구회 제2대 회장을 지냈다. 부산사범학교 김석준, 박형태, 경남여고 박정숙이 합창단 단원이었다. 김석준은 금수현이 창단한 부산극장 전속예술단 새들예술원 출신이며, 박정숙은 전국음악콩쿠르에 입상한 소프라노, 박형태는 동주대 교수를 지낸 성악가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낙동강’ 원본 필름을 발굴해 지난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했다. 영화사적 의미를 제쳐두더라도 전중기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문화적 연대와 실천을 엿볼 수 있어 부산문화예술사에서 각별한 의의를 지닌다. 윤이상의 유일한 영화음악이라 음악사에서도 뜻깊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전시 상황에서 반공주의를 강화하는 한편 결전의지를 고취하는 효과적인 미디어였다는 사실을 쉽게 지나칠 수는 없다. 예술이 국가주의 기획 속에서 대중의 정서와 감정을 통제하는 무기로 동원되던 한국전쟁기, ‘낙동강’은 문화정치의 최전선에 투하된 폭탄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