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조용한 사직
문화부장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다. 특히 획기적인 과학기술의 발명이나 세계대전과 같은 초대형 사건들은 사람들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급격하게 바꾼다. 더욱이 최근 몇년 동안의 변화 속도는 그 어느 때보다 무척 빠르다. 기술의 발달에 따른 휴대폰과 SNS의 보편화, 지구촌 단일 생활권화, 자유와 다양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생활양식의 일반화 등은 패러다임 전환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가을이면 내년 미래 트렌드를 예측하는 서적들이 대거 출간된다. 그 중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김난도 교수와 연구위원들이 해마다 내놓는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는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김 교수는 최근 〈트렌드코리아 2023〉 출간 간담회를 갖고 ‘오피스 빅뱅’ 시대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승진보다 업무환경, 조직보다 개인, 평생 직장 개념보다 조기 은퇴가 한층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이 ‘오피스 빅뱅’의 골자라고 할 수 있다.
김 교수는 간담회에서 “직장 문화가 빅뱅 수준으로 엄청나게 바뀌고 있다”고 밝혔다. 젊은 세대가 경직된 직장 문화와 고압적인 선배들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피스 빅뱅의 원인으로는 기성 세대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세대가 회사에 진입한 점, 평균 수명 연장으로 인생 전체에서 회사 등 직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아진 점, 코로나19로 경험한 재택근무가 그간의 조직 관행이나 문화에 대한 의문을 갖도록 했다는 점 등이 꼽힌다.
‘오피스 빅뱅’과 관련해 최근 ‘조용한 사직’이라는 신조어도 유행 중이다. ‘조용한 사직’이란 퇴사를 하진 않지만, 마음이 이미 떠났기 때문에 최소한의 업무만 하는 것을 뜻한다. 월급에 비례해 해직 당하지 않을 만큼만 일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제로 한국 사회는 MZ 세대가 경제활동을 시작하면서 이미 ‘오피스 빅뱅’시대에 진입했다. ‘조용한 사직’도 낯설지 않은 개념이다. 트렌드 분석 서적이 이런 전망을 구체화한 것은 이런 가치관이 일반화되는 시대로 진입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오피스 빅뱅’과 ‘조용한 사직’은 일종의 방어기제라는 생각이 든다.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한 구태의연한 조직문화, 세대 특성을 파악하지 못한 인사 담당자와 경영진 등이 트렌드 확산을 한층 부추겼다는 의구심을 갖는다. 시대 변화에 무심한 낡은 체제로는 미래는 물론 현재도 감당하지 못한다. ‘오피스 빅뱅’ 시대에 대한 명확한 현실 인식과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천영철 문화부장 cyc@busan.com
천영철 기자 cyc@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