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달맞이고개 붉은여우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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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잠잔다/ 잠꾸러기/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밥 먹는다/ 죽었니 살았니?” 1980년대 즈음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골목 친구들과 함께 불렀을 동요가 ‘여우야 여우야’이다. 이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동네 골목이나 집 마당에서 술래를 정해 ‘여우놀이’를 하다가 집에 불려 들어가곤 했다.

실제로 여우는 전통적으로 한민족의 생활 깊숙이 자리 잡았던 친근한 동물이었다. ‘여우는 죽을 때 자기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두고 죽는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처럼 정감이 있는 동물로 생각됐다. 또, 천년 묵은 여우가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구미호로 변신해 사람을 괴롭힌다는 전설과 함께 약삭빠르고 영리한 사람을 비유하는 동물로도 여겨졌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여우는 인가 주변과 산기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동물로 기록돼 있다. 이런 여우가 한반도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1960~1970년대 정부 차원의 쥐잡기 운동과 서식지 파괴, 값비싼 여우 털을 얻기 위한 밀렵 등이 멸종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멧돼지, 고라니 새끼를 사냥해 개체수 조절에도 관여하던 여우의 멸종이 최근 멧돼지 수 급증과 농작물 피해로 이어졌다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환경부는 2012년부터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인 토종여우 복원 사업을 경북 영주시 국립공원연구원 중부보전센터에서 벌여 왔다. 이렇게 태어난 붉은여우 수컷 한 마리가 지난해 12월 경북 영주시 소백산 일대에 방사된 뒤 부산 해운대구 달맞이고개 야산에서 발견돼 화제다. 장거리 이동은 여우의 습성이지만, 수컷 붉은여우는 소백산에서 충북 단양군과 강원도 영월·평창군, 동해시로 이동한 뒤 남쪽으로 방향을 꺾어 동해안을 따라 울진·포항·울산을 거쳐 부산까지 국토를 종단했다고 한다. 전체 이동 거리가 400㎞에 이른다.

몸이 붉고, 꼬리 끝에 하얀 털이 있는 그 붉은여우가 먼 길을 걸어오면서 인간 세계에서 무엇을 보고, 인간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지구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고, 생태계 파괴의 피해는 인간에게 돌아간다”는 경고이지 않았을까. 수컷 붉은여우는 대부분 일부일처제와 가족 공동체를 선호한다고 하다. 수컷 여우가 제 짝을 찾아 가족을 이루기를 기원한다. 언젠가 아이들이 달맞이고개 붉은여우 가족과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살았다. 밥 먹는다”라고 화답하면서 자연과 공존하기를 꿈꾼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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