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전 한·중·일 해상 교역 거점 늑도에서 ‘가야’ 시작되다 [깨어나는 가야사] 1.
[깨어나는 가야사] 1. 가야의 서막 ‘늑도 교역’
고조선 준왕 남래로 열린 삼한시대
낙랑군 설치로 철기문화 세례 가속
김해·경주보다 두각 보인 건 늑도
150여 년 동아시아 교역 본거지
세계문화유산 추진 가야고분군
철기문화 품은 가야사 정리 필요
기원전 1세기 고대 동아시아 교역 네트워크의 중심지이자 ‘늑도 교역’의 본거지인 늑도 유적이 있는 경남 사천시 늑도 전경. 문화재청 제공
역사에는 미스터리가 많다. 역사는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된다는 점에서 미스터리는 역사의 본질에 육박한다. 가야사 매혹이 거기에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가야고분군이 품은 ‘깨어나는 가야사’를 들여다보는 시리즈를 싣는다.
기원전(BC) 3세기 한반도에 철기가 들어왔을 때 아무래도 서북한이 철기문화를 먼저 접한 선진지역이었다. 한반도 남부는 100년 차이를 두고 BC 2세기 정도가 돼서야 철기시대로 접어들었다. 변변한 도로도 없고, 산과 강으로 막힌 그 시대에 새로운 철기문화가 번져가는 양상은 아주 느릿했다. 철기시대 이전 한반도 남부는 대한민국의 ‘韓’으로 표현되는 ‘한 문화’ 지역이었다. ‘한(韓) 문화’는 아마도 수만 년에 걸친 구석기·신석기·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삶이 총체적으로 집적된 문화였을 것이다. 철기가 들어오면서 한(韓)은 삼한(三韓)으로 나아갔다.
당시 역사적 사건은 없었나, 하고 찾아보면 BC 194년 연나라 위만이 고조선에 들어와 위만조선을 세웠는데, 그때 왕위를 찬탈당한 고조선 준왕이 2000호 무리를 이끌고 남쪽(전북)으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뱃길을 이용한 그 피란 행로는 거대한 장정이었을 것이다. 이때 한(韓)의 땅에 내려온 준왕 무리는 마한(馬韓)을 열었다고 한다. 혈통적으로 보면 삼한의 한족과 고조선 예맥족이 섞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한이 아닌 오늘날 경상도 지역은 진한과 더불어 ‘변한/변진’이라고 애매하게 섞어서 불렀다. 그것이 먼 곳, 변방을 보는 중국 역사 기록자의 시각이었다. 기록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삼한의 역사를 촉진시킨 것은 무엇보다 그 땅에 사는 숱한 사람들의 희로애락과 피땀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것은 ‘준왕 남래(南來)’가 있었던 그 90년쯤 뒤의 큰 역사적 격동이다. BC 108년 고조선(위만조선)의 멸망과, 낙랑군 등 한사군 설치가 그것이다. 낙랑군(대방군)은 문제적이다.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우선 그 400년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논란도 그렇고, 동아시아 책봉 질서 속에서 삼국시대는 물론 그 이후까지 ‘낙랑군’ 명칭은 끊임없이 등장했다. ‘동이’ ‘낙랑(대방)’ ‘삼한’, 그 명칭들은 한참 동안 계속됐다.
여하튼 한사군 설치 이후인 BC 1세기부터 ‘낙랑 문화’로 대표되는 철기문화가 한반도 남부를 새롭게 자극했다. 그 자극을 소화하면서 한반도 남해안과, 남부의 낙동강·남강·형산강의 아주 복잡한 본류·지류 물길을 따라 소국 형성이 가속화됐다. 그리하여 경상도 지역에 대체로 3개 권역이 만들어지는데 사천 늑도 권역, 김해·부산 권역, 경주·울산 권역이 그것이다.
이 중 가장 먼저 두각을 드러낸 곳이 늑도였다. 김해와 경주가 아니라 사천 늑도였다는 것은 당시 내륙 루트보다 덜 위험하고 더 수월한 바닷길의 지리적 경로와 관련이 높다. 늑도가 낙랑과 왜를 잇는 절묘한 중간지점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늑도는 사천시~남해군 바닷길을 잇는 창선·삼천포대교가 지나가는 섬이다. 일대 풍광이 빼어나 ‘한국의 아름다운 길’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 아름다운 길의 늑도는 BC 1세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100~150년간 한·중·일을 잇는 ‘늑도 교역’의 본거지였다. ‘늑도 교역’은 한(漢)-낙랑-한반도 서해안-늑도-쓰시마-이키섬(壹岐島)-북부 규슈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교역 체계였다. 해양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동아시아 문화권이 비로소 형성됐던 것이다.
2001년 창선·삼천포대교 공사 때 유적 발굴 모습. 부산일보DB
늑도는 천혜 조건을 갖췄다. 남북의 낮은 봉우리 사이 완만한 경사면, 잘록한 섬 동서쪽의 작은 만(灣)은 마을과 항구가 자리 잡기에 제격이다. 무엇보다 식수가 풍부하다.
‘고고학 보고’라는 늑도 유적은 3가지 특징을 보여 준다. 첫째 낙랑과의 교역을 증명하는 반량전 오수전의 중국 돈, 한나라 거울, 낙랑계 토기 등은 늑도가 선진 문물의 경유지였다는 것이다. 둘째 놀랍게도 늑도에 ‘왜인 마을’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왜의 야요이계 토기와 야요이인 무덤이 많이 발굴됐는데 이는 늑도에 체류한 왜인 집단이 남긴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교역에 필요한 인적 자원으로 브로커 통역자 노동자 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김해 구산동 유적에서도 마찬가지로 왜인 집단 거주가 확인되는데 이는 당시 남해안에서 드문드문 확인되는 양상이다. 한반도 남부에서 넘어가 야요이시대를 주도적으로 열었던 도래인, 그 후손인 야요이인들이 수백 년 뒤 다시 조상 땅을 찾아온 격이다. 그들 조상이 “우리는 물 건너에서 왔어”라는 말을 남겼던 것일까. 고대 국가 형성 전, 경계가 그어지기 전, 한반도-일본 열도의 접점과 왕래 양상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셋째 늑도에는 늑도와 연결된 내륙에서 차출돼 이주해 온 대규모 공인 집단이 있었다는 것이다. 묘역도 따로 조성된 이들은 제철, 실뽑기, 면짜기, 골각기 작업 등 다양한 일을 했다고 한다. 제품 원료가 없는 곳에 존재한 이런 공인 집단은 내륙의 상위 집단에 의해 계획적으로 동시에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 이런 세 가지 특징에 근거할 때, 늑도는 제철 유적을 갖춘 상공업 전문 취락, 물품 공급·교환이 진행된 항해자들의 중간 기착지, 해상 교역 주도세력의 전진 기지 등으로 볼 수 있다는 여러 견해가 있다.
큰 틀의 해양사적 조망을 할 때 늑도는 무엇보다 동아시아 교역 네트워크의 거점으로 장차 한반도 남부가 왜와 맺어갈 관계의 서막을 보여 주면서 한·중·일을 잇는 동아시아 지중해 교역이 비로소 형성됐음을 증명한다. ‘늑도 교역’은 1세기 어느 시점부터 그 기능과 역할이 쇠퇴하면서 전기를 마련하려다가 완전히 와해됐다고 보고 있다. 과연 어떤 역사적 격동이 있었을까.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