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 ‘줄무늬 옷’은 아웃사이더를 상징했다

천영철 기자 cyc@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스트라이프, 혐오와 매혹 사이 / 미셸 파스투로

줄무늬 패션 속 숨은 상징체계 풀어내
중세 땐 무질서와 범법, 경멸의 대상
‘사회 질서’ 어지럽히는 것으로 인식
근대 접어들면서 ‘낭만’ 등 의미 얻어

프랑스 혁명 당시 파리 시민들은 줄무늬가 들어간 엠블럼, 장식용 띠, 옷을 애용했다. 줄무늬는 중세 시대에는 배척의 대상이었지만 자유를 상징하는 보편적인 무늬가 된 것이다. 사진은 1790~1791년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장 바티스트 르쉬에르의 그림 ‘애국 시민의 행진’. 미술문화 제공 프랑스 혁명 당시 파리 시민들은 줄무늬가 들어간 엠블럼, 장식용 띠, 옷을 애용했다. 줄무늬는 중세 시대에는 배척의 대상이었지만 자유를 상징하는 보편적인 무늬가 된 것이다. 사진은 1790~1791년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장 바티스트 르쉬에르의 그림 ‘애국 시민의 행진’. 미술문화 제공

1254년 프랑스 파리에서 줄무늬(스트라이프) 옷과 관련한 소동이 발생한다.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루이 9세와 동행한 카르멜회 수도사들이 어깨에 걸친 망토 때문이었다. 이 망토에는 네 줄의 흰 띠와 세 줄의 갈색 띠가 있었다. 카르멜회는 몇몇 수도자들이 팔레스타인 카르멜산 근처에 정착해 만든 수도회로 고행과 기도, 노동을 하며 청빈한 생활을 실천했다. 하지만 줄무늬 망토를 걸친 카르멜회 수도사들은 파리에 입성하자마자 파리 시민들로부터 욕설과 조롱을 들어야 했다. 시민들은 ‘빗금 쳐진 수도사들’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며 악담을 퍼부었다. 현대에서는 멋쟁이들의 패션 아이템으로 통하는 줄무늬 옷에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것일까.

〈스트라이프, 혐오와 매혹 사이〉는 악마의 상징이자 배척의 대상이었던 줄무늬가 자유를 상징하는 보편적인 무늬로 유행하기까지 ‘변화무쌍한 줄무늬의 문화사’를 다룬다. 다양한 사진과 흥미로운 사례들을 통해 줄무늬의 역사와 그에 얽힌 상징체계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중세 유럽에서 줄무늬는 혼란을 야기하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카르멜회 수도사들의 줄무늬 망토는 당시 이교도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던 중세 사람들에게 이슬람교도들이 입는 줄무늬 젤라바의 일종으로 간주돼 소동을 빚은 것이다. 특히 파리 시민들에게 익숙했던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크회, 시토회, 기사 수도회 소속의 수도사들은 민무늬 망토를 걸쳤기 때문에 줄무늬 망토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을 더욱 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 서양의 사료나 문학 작품, 도상 등에는 줄무늬 옷을 입은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실존 인물이든 허구의 인물이든 그들 모두는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소외되거나 배척된 사람들이었다. 유대인이나 이단자, 어릿광대나 곡예사, 망나니, 원탁의 기사들 이야기에 나오는 반역자, 구약 성서 시편에 나오는 ‘어리석은 자’, 유다 등 대부분이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타락시키는 사람들이었고,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거의가 악마와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물론 줄무늬의 문제는 단순히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시각적 인식의 문제일 수도 있다. 성직자가 줄무늬 옷을 입었을 때만 일탈이나 추문으로 여겨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세 사람들은 바탕과 무늬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음으로써 시선을 혼란스럽게 하는 모든 표면 구조에 혐오감을 느꼈다. 그들은 물체를 한 면 한 면 순서대로 읽어 나가는 데 익숙했기에 바탕과 무늬가 분간되지 않는 줄무늬에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줄무늬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었고, 이때부터 사회 하층민들에게 줄무늬 옷을 강제로 입히기 시작했다. 줄무늬는 반역자, 죄수 등 아웃사이더를 대표하는 무늬였던 것이다.

무질서와 범법, 경멸의 대상이었던 줄무늬는 유럽 사회가 근대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형태와 의미를 부여받는다. 줄무늬 역사에서 이미지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의복에서 줄무늬가 다채롭게 사용되면서 사회 계층을 구분하던 과거의 기능은 희미해진다. 축제나 일상생활에서 줄무늬 옷을 입은 사람이 늘어났으며, 이국풍의 줄무늬 옷과 하인들의 줄무늬 옷도 자주 눈에 띄었다. 줄무늬 직물은 대표적으로 쓰이던 의복과 문장 외에도 실내나 가구 장식, 항해, 위생 등 여러 분야에서 사용 빈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줄무늬의 역사는 미국에서 독립 혁명이 시작된 1775년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그리 흔하지 않았고 이국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줄무늬가 의복은 물론이고 직물, 엠블럼, 실내 장식의 세계로까지 물밀 듯 파고들었다. 그리고 낭만과 혁명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었다.

1800년대 프랑스 해군은 스트라이프 군복을 채택한다. 선원들이 바다에 빠졌을 때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나폴레옹의 승리를 기념하면서 더 많은 선원들이 스트라이프 군복을 입기 시작하였고 대중들에게 바다를 연상케 하는 시원함과 밝고 경쾌한 이미지의 마린룩으로 사랑받기 시작한다. 저자는 줄무늬가 자연의 기호가 아니라 문화에 의해 만들어진 기호임을 강조한다. 줄무늬는 인간이 주위에 흔적을 내거나 사물에 새겨 넣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로 요구한 것이라고 한다. 인간이 사물에 만들어 낸 줄무늬는 구별의 표지이자 관리와 통제의 의지를 나타내기도 한다. 상품들에 부착된 바코드가 대표적인 예다.

저자 미셸 파스투로는 중세 문장학의 대가이며 색채 분야의 국제적 전문가다. 1947년 파리에서 태어났고 소르본 대학교와 국립 고문서 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 〈파랑의 역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검정의 역사〉 〈초록의 역사〉 〈빨강의 역사〉 〈색의 인문학〉 등을 발표하며 색과 관련한 풍부한 인문 사회학적 지식을 소개하고 있다. 미셸 파스투로 지음/고봉만 옮김/미술문화/238쪽/2만 2000원.


천영철 기자 cyc@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