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기 초 고대 한반도 남부서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전쟁 [깨어나는 가야사] 2.
[깨어나는 가야사] 2. 포상팔국 전쟁
항구를 낀 8개 나라 가담
‘신세력’과 ‘구세력’대결
‘늑도 교역’→ ‘김해 교역’ 확정
금관가야 지위 확고해져
포상팔국 전쟁의 결과 금관가야 지위가 확고해졌다. 금동관 일부가 출토된, 금관가야 유적인 김해 대성동고분군 발굴 현장 모습과 김해 대성동고분박물관의 금관가야 무사상(오른쪽 작은 사진). 연합뉴스·부산일보DB
가야사에서 첫 번째 획기적 역사는 3세기 초 ‘포상팔국(浦上八國) 전쟁’이다. 이 전쟁은 고대 한반도 남부에서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전쟁이다. ‘전쟁 압력’이 높아지던 철기시대는 철의 강력한 무력이 서로 충돌하면서 사회 계급 분화와 ‘국가’ 형성이 가속화된 시대다. 가야 지역에서 ‘대국(大國)’은 4000~5000가(家), ‘소국(小國)’은 600~700가를 헤아렸다고 하며 그 지평선에서 금관가야(가락국), 아라가야(아라국) 등이 부상할 것이었다.
포상팔국 전쟁은 가야에서 교역 중심이 ‘늑도 교역’에서 ‘김해 교역’으로 대체된 것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확정했다는 의미를 지니는 전쟁이다. 기원전(BC) 1세기 이후 중개 기지 역할의 늑도 교역은 기원후(AD) 1세기 후반께부터 이미 김해 교역에 서서히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김해 권역은 철광석과 숯의 안정적 확보를 통해 철을 직접 생산할 수 있다는 이점으로 늑도 권역을 제치면서 부상하고 있었다. ‘신세력’의 부상과 아성에 맞서 ‘구세력’이 전쟁을 벌인 것이 포상팔국 전쟁이었다.
포상팔국은 포(浦), 항구를 끼고 있는, 고성 창원 사천 칠원 등지의 8개 나라다. ‘늑도 교역’은 늑도 한 곳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역 체계에서 이득을 구현하는 다수 국가를 아우르는 것으로 성장해 있었다. ‘김해 교역’도 마찬가지다. 김해 교역도 시기에 따라 다호리세력, 양동리세력, 대성동세력으로 그 중심을 이동해 가면서 주변 지역을 하나의 권역으로 아울러갔다. 그것이 4세기 이후인 나중에는 부산 복천동 세력까지 포함하면서 금관가야 권역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포상팔국 전쟁의 전모는 아직까지 확정돼 있지 않다. 전쟁 시기만 놓고 보더라도 3세기에서 6세기, 심지어 7세기까지 예닐곱 가지의 다양한 설이 있을 정도다. 그뿐만 아니라 전쟁의 주체, 원인, 결과에 대한 다양하고 복잡한 관점이 제시돼 있다. 그만큼 가야사는 그 실체를 아직 베일 속에 가리고 있다. 하지만 포상팔국 전쟁에 관한 관점 중 유력한 하나를 요약하면 3세기 초 포상팔국이 가락국을 침공했으며, 신라가 가락국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있는 총 3건의 관련 기록을 그대로 따르면 포상팔국 전쟁은 209년과 212년에 1차, 2차 전쟁으로 일어났다는 내용이다. 1차 전쟁은 209년 포상팔국이 김해 금관가야(가라국)와 함안 아라가야(아라국)를 공격했으나 신라가 구원병을 보내 크게 패했다는 것이다. 2차 전쟁은 그 3년 후인 212년 포상팔국 중 3국(골포, 칠포, 고사포)이 신라 갈화성(울산)을 공격했으나 또다시 패했다는 것이다. 2차 전쟁은 3국이 일으켰기 때문에 ‘포상삼국 전쟁’으로 부를 수 있으나 통상 1, 2차 전쟁을 한데 묶어 포상팔국 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포상팔국 전쟁은 가야사 전개를 크게 촉진했다. 전쟁 결과, 해상제국으로서 김해 금관가야의 지위가 확고해졌다. 이 전쟁의 핵심은 해상교역권 쟁탈전이었다는 것이다. 이때 크게 타격을 입은 늑도 교역의 서부 경남 제국(諸國)들은 ‘소가야 연맹’으로 다시 크게 부상하는 5세기 중반 이후를 기약해야 했다.
포상팔국 전쟁은 신라 부분을 걷어내면 가야권역의 동서 내부 전쟁이다. 중간에 놓인 함안 아라가야를 서쪽 진영으로 보기도 하지만 대체로 동쪽 진영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는 고고학 발굴에 의해 전기 가야 때 아라가야가 금관가야와 함께 어느 정도의 양대 세력을 형성했다고 보는 관점과 맞물린다.
이른바 ‘삼국지 시대’였다. 당대 동아시아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중국은 한나라 말기, 황건적의 난(184) 이후 저 유명한 적벽대전(208)을 치르면서 이미 조조-유비-손권의 명실상부한 삼국지 쟁투에 돌입한 시대였다. 일본 열도 왜(倭)의 경우, 2세기 후반 북부 규슈 세력과 기내(畿內) 세력이 서로 다투었다는 70~80년간의 왜국대란(倭國大亂)이 벌어진 시기였다.
포상팔국 전쟁은 동아시아 격동과 연동된 측면이 있다. 고대 동아시아 교역 체계는 중국·낙랑-가야-일본 열도의 연결 고리를 이뤘다. 가야를 중심에 놓고 볼 때 중국·낙랑의 장력과, 일본 열도의 장력이 팽팽하게 작용했다. 이른바 한나라 환령지말(146~189) 이후 중국의 정치적 혼란으로 중국·낙랑의 장력이 약해지면서 가야 교역은 점차로 일본 열도의 장력에 이끌리게 된다.
특히 일본 열도는 강력한 무기를 요구하는 전시 각축 상황에서 가야 철을 얻기 위한 쟁탈전을 벌였다. 왜의 철 쟁탈전에 늑도보다는 김해가 철 생산과 지리, 항구 입지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 이 판도를 다시 뒤집어보려 한 것이 포상팔국 전쟁이었다. 가야사와 일본 고대사는 장차 철, 무기와 군사까지 오가고, 도래인이 집단 이주하는 강력한 관계망 속에서 아주 긴밀하게 연동돼 전개되기 시작한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