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주인 잃은 신발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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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DC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찾았을 때였다. 기념관 3층에 들어서자마자 2000켤레의 낡은 신발이 뒤죽박죽으로 켜켜이 쌓인 벽과 맞닥뜨렸다. 성인 남자의 출근용 구두, 젊은 여성이 신었던 펌프스화, 소년들의 운동화, 아장아장 겨우 걸음마를 뗀 아이의 신까지. 폴란드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에 끌려온 유대인들이 나치 군인에게 압수당한 신발이었다.

그 옆에는 폴란드 출신 유대인으로 레지스탕스 운동에 투신했던 시인 모제스 슐슈타인의 “우리는 신발이요 최후의 증인입니다. 주인을 잃어버린 이 신발들이야말로 유대인의 몸에 닥친 운명을 웅변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신발 더미에서 신발 주인의 체취와 고통, 공포를 절감할 수 있었다. 숨조차 쉬지 못하고 깊은 침묵에 빠져들면서 눈물을 흘렸다.

주인 잃은 신발이 억울한 희생과 참사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1940년대 전후 나치가 점령한 헝가리를 그린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주요 배경인 부다페스트의 세체니 다리와 도나우강 주변에는 3500여 명의 유대인 학살을 추도하고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쇠로 만든 신발 60여 켤레가 전시돼 있다.

2014년 5월 세월호 참사 때에도 운동화 사진 한 장에 온 국민이 울음을 터트렸다. 막내딸의 무사 귀환을 바라던 어머니가 팽목항에 놓아둔 운동화였다. 오른쪽 운동화에는 “막내야 친구가 예쁜 신발 사 왔어. 엄마, 언니도 오빠도 모두 보고 싶어. 기다린다”라고, 바다에 쓸려갔다가 가까스로 건져낸 왼쪽에는 “막내야 어서 나오렴. 동생아 빨리 와”라고 간절하게 적혀 있었다.

코로나로 인한 거리 두기가 해제되면서 3년 만에 일상으로 돌아가나 싶더니, 꽃 같은 젊은이 150여 명이 순식간에 압사 당해 숨졌다. 사고 다음 날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해밀턴호텔 옆 골목 곳곳에는 사상자들이 인파에 밀리고 넘어지면서 남은 굽 높은 뾰족구두와 운동화 등 벗겨진 신발과 핼러윈 파티용 풍선 등이 나뒹굴었다.

주인 잃은 신발들은 아수라장 같았던 참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 참혹함은 온 국민을 깊은 침묵과 탄식, 슬픔으로 빠져들게 한다. 세월호 사태 이후 8년간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라고 입으로만 외친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현실이 아니라 나쁜 꿈이었으면, 빨리 악몽에서 깨어났으면 좋겠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하루아침에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유가족, 친구를 떠나보낸 모든 분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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