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푸른 청춘의 삶을 길어 올리는 시간
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이태원 압사 참사 현장 인근의 추모공간. 부산일보DB
청년세대는 진보적인가? 4월혁명과 민주화를 이끈 세대는 자기 계발과 성공을 중시한 신자유주의 세대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 청년세대를 동일한 범주로 묶을 수 있는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이라도 지역이나 학력, 젠더와 취향, 정치적 신념, 경제력에 따라 목소리는 천차만별이다. 이 지점에서 카를 만하임은 세대론의 한계를 지적했다. 세대에 관한 실증주의적 접근은 시간의 질적 차원을 고려하지 못하고 청년세대가 기성세대보다 진보적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생산했다. 반면, 낭만주의적 세대 연구는 다양한 사회적 요소를 간과하여 동일 세대 내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세대 문제에는 생물학적 연령이 아니라 세대를 지배하는 사회적 관념이 작용한다.
68혁명 이후 기성세대가 청년에 투사한 표상은 어떠했을까. 사회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기성세대를 긴장시키는 존재이자 사회 발전의 동력이라 믿었다. 청년은 진보 그 자체로 인식되었다. 취업과 독립이라는 생애의 과업 달성을 압박하는 한편, 사회문제에도 짱돌을 던지며 나서는 진취적 기상을 요구했다. 그렇지 못한 청년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로서의 가치를 부정당했다. 오늘날 청년이 처한 현실은 어떠한가. 외환위기 이후 고착화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속에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한데도 실업은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못난 탓인 것만 같다. 일터에서 비참한 죽음으로 내몰리는 일이나 보호종료아동이 처한 절박한 현실을 바라보는 일도 고통스럽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며 더불어 살기를 고민하기란 실존의 근원을 묻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청년세대의 불안과 절망은 취업난이나 생활고에만 있지 않다. 어여쁜 청춘들이 차가운 바다에서, 축제의 길 위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현실에는 차마 할 말을 잃고 만다. 잇따른 참사에도 애도와 추모를 강요할 뿐 거대한 슬픔의 실체를 마주하지 않으려는 국가의 대응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고립무원의 불안과 우울은 공포로 이어진다. 기성세대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청년은 다만 정책적으로 소비되는 존재인가. 그들의 현실을 냉엄하게 직시하지 못한 기성세대의 사랑과 격려가 그들의 마음에 온전하게 가닿을 수 있을까. 그날, 세월호에 탄 학생들과 이태원에 모인 푸르른 청춘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다만, 그날, 거기, 그렇게 있었을 뿐이다. 오늘, 강의실을 나서는 청춘이 가을 햇살만큼이나 눈부시다. 자본주의를 성찰하는 철학도 K,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이탈리아 유학생 A, 지역의 미래를 고민하는 공학도 J, 자신의 인식체계를 끊임없이 확장 중인 국문학도 L. 저기, 우리 시대의 청년들이 가을을 걷는다. 푸른 청춘의 어깨를 짓누른 슬픈 축제의 기억을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