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저들이 저급하면, 우린 더 저급하게
전창훈 서울정치팀장
‘총기 참사’ 치유의 계기로 만든 오바마
‘이태원 참사’ 이후 우리 정치와 대조적
참사 정쟁화로 막말, 모욕 더 극단화
‘저급 경쟁’하는 정치에 국민 환멸 심화
추모사가 끝날 즈음, 잠시 멈칫하던 대통령이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한다.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놀라운 은총)~”. 뜻밖의 상황에 놀람도 잠시, 이내 청중들이 따라 부르고 희생자들에 대한 신의 은총을 비는 6000명의 기원이 장엄하게 울려 퍼진 장례식장은 거대의 치유의 공간이 된다. 2015년 6월 미국 사우스케롤라이나 주 찰스턴에서 벌어진 백인 청년의 흑인 교회 난사 사건 직후 오바마 대통령이 이끌어낸 이 장면은 그의 재직 기간 중 ‘최고의 순간’으로 오래 기억됐다.
‘이태원 참사’ 직후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한 윤석열 대통령은 그 기간 매일 분향소와 추모 종교 행사에 참석했다. “국민의 안전은 국가의 무한 책임”이라고 누차 강조했다. 전대미문의 참사라고 해도 현직 대통령이 이 정도로 추모에 공을 들인 건 처음이지 싶다. 그러나 이 사실을 기억하는 국민은 많지 않아 보인다. 물론 참사의 성격, 추모 문화의 차이 등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 어렵지만, 대통령의 노력이 민심에 가닿지 않는 현실은 안타깝다.
그 배경에는 윤 대통령의 말·행동과 공명하지 못하는 여권 고위층의 무심한 발언들이 있다. “웃기고 있네”(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 “매번 사건이 터질 때마다 장관 바꿔라, 청장 바꿔라 이건 좀 후진적”(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 “누군들 폼나게 사표 던지고 싶지 않겠나”(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서울 도심에서 황망하게 생을 마감한 159명의 시민들에 대한 깊은 애도의 마음도, 애타는 호소에 귀를 막은 공권력의 부재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도 읽혀지지 않는다. 대신 이 사태가 대통령과 정권의 안위를 흔들지 못하도록 하는 게 최우선 과제라는 속내만 은연 중 드러날 뿐이었다. 결국 탄핵으로까지 연결된 세월호의 ‘악몽’, 밀리면 안 된다는 불안과 경계심이 여권을 지배하는 정서였다.
민주당의 대응 역시 예상 경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추모의 시간은 5일의 애도기간을 채우지 못했다. ‘112신고 녹취록’이 공개되자 야권 성향 단체들과 연계해 기어이 정권 퇴진 공세에 불을 붙일 기세다. “윤석열 정부가 젊은이들을 좁은 골목으로 몰아넣고 떼죽음을 당하게 했다”는 극언도 서슴지 않는다. 이 ‘기회’를 활용해 여권에 치명상을 입히겠다는 적의만 가득해 보인다. 이제 와서 희생자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는 게 참사 국면을 더 길게 끌고 가자는 의도 외에 어떤 추모의 의미가 더해지는지 모를 일이다.
국가적 아픔을 화해와 통합의 에너지로 승화시킨 먼 나라 사례가 그저 판타지 소설 같아 보이는 현실이 쓰리지만, 우리 정치는 ‘참사의 정쟁화’를 계기로 대결 정치를 더 극단으로 밀어붙일 기세다. 전직 대통령의 ‘풍산개 반환’을 두고 정치권이 며칠째 갑론을박을 벌이는 모습은 내 낮은 반려동물 감수성을 감안해도 이해하기 힘들다. 평소 반려동물에 극진해 보였던 이의 냉정한 모습이 다소 실망스럽더라도, 무슨 치명적인 인격적 결함이 드러난 것 마냥 난리법석을 떨 일은 아니지 않나.
못마땅한 비판 보도에 대통령 전용기 탑승 거부로 되갚은 정권의 협량함도 실망스럽다. 경험해 본 기자들은 알겠지만 해외 순방에서 전용기 탑승이라는 게 이동의 편의는 크지만, 거기서 배제된다고 취재와 보도에 크게 불리할 것도 없다. ‘나를 물 먹인 만큼 너도 고생 좀 해봐라’는 얄팍한 복수 심리 외에 다른 이유를 찾기 힘들다.
그렇다고 온 사회가 ‘언론 재갈물리기’라고 반대한 언론 징벌적 손배제를 끝까지 밀어붙이던 민주당이 이를 바로잡겠다며 언론자유 특위 구성 등 부산을 떠는 것도 언론인이지만 전혀 고맙지 않다. 해외 순방 중에 대통령 부인의 봉사 활동을 두고 “빈곤 포르노” “고통 받는 사람들을 장식품처럼 활용하는 사악함” 등 갖은 험구로 비난하는 내부의 ‘막말 자유’, 정권 비판에 눈이 멀어 외국 대사의 발언마저 비트는 ‘왜곡 자유’ 행태부터 손 볼 일이다.
“When they go low, we go high.”(저들이 저급하게 해도 우린 품위 있게 갑시다.) 2016년 9월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공화당 트럼프 후보의 막말 공세에 이런 근사한 캐치프레이즈를 내놓은 미셀 오바마는 “분노는 그 순간에 기분이 좋을진 모르지만,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다. 정적의 작은 흠결도 침소봉대해 증오를 부추기는 정치인은 그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없다. 그저 지지층의 복수 정서에 기대 자기 정치를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지지율 하락이 몸이 단 여당이나 ‘이재명 방탄’에 매몰된 야당 모두 이런 품격을 찾을 여유도, 감수성도 없어 보인다. ‘저들이 저급하게 하면 우린 더 저급하게’. 우리 정치의 현 주소에 대한 국민적 환멸이 심화되고 있다.
전창훈 기자 jch@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