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부산도 이젠 항일(抗日)에서 감만(戡蠻)의 역사를 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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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용섭 동의대 소프트웨어융합학과 교수

지난달 5일이 부산시민의 날이라는 사실을 아는 시민과 그 날이 왜 시민의 날로 정해졌는지를 아는 시민은 관련부처 공무원들과 몇몇 기자, 일부 기성세대들을 제외하곤 없다고 보는 게 맞다. 올해는 부산국제영화제와 함께 시작해 행사가 묻혀버려 인근 진주시에서 추진하는 시민의 날 행사와는 사뭇 달랐다. 43년전 시민들의 의견을 모아 지정한 시민의 날에 대한 자체 홍보도 부족 했거니와 시민들의 적극적 호응을 받지 못했고 올해 27회째 맞은 부산국제영화제 기간과 겹치다 보니 행사가 있는둥 없는둥 했으리라 본다.

그런 참에 며칠전 초량교차로 근처에 있는 항일거리를 지나가면서 임진왜란당시 부산포진성 첨사로서 쳐들어오는 왜적들에 대항해 목숨걸고 싸웠던 정발장군의 동상과 한일병합당시 강제로 끌려갔던 징용노동자상이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는데 그 길이 왜 항일의 거리인지를 설명하는 이정표는 없고 성화봉송로 비석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부산 남구 감만동에서 태어난 시민의 한 사람으로 학창시절 동네 이름이 궁금해 옥편을 찾아보고 너무 놀랐다. 감(戡)자는 물리쳤다는 의미이며 만(蠻)자는 남쪽 오랑캐를 의미하는 왜구, 왜적 등 일본을 지칭하니 왜적을 물리친 동네 아닌가? 이후 고향을 떠나 다시 돌아온 40년 세월속에 부산은 감만의 역사가 아닌 일제 강점기 시절 강제징용과 수탈의 종착지로 아픈 기억만 남긴 패배의 역사가 곳곳에 맺혀 있는 도시가 되어 버렸다.

사실 부산을 대표하는 역사속 인물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으로 앞에서 언급된 정발장군, 부산시민공원 인근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였던 송상현 동상과 부산포해전의 불세출 영웅 이순신 장군 동상이 용두산공원에 있지만 유독 작고 빈약해 보이는 동상이 왜 이순신인지를 부산시민들은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건립년도가 가장 오래돼 그랬다면 서울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장군 동상과는 규모와 인지도면에서 차이가 나도 너무 심하게 난다.

유독 부산은 이웃 나라 일본과 오랜 세월 수많은 충돌이 있었고 이로 인한 피해만을 강조하는 이유가 해방 이후 친일 역사가들이 그들의 당위성을 내세워 죄값을 면피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젠 부산에서의 감만, 오랑캐를 물리친 역사를 써 내려가야 할 차례라고 생각한다.

1600여 년전 경주까지 쳐들어 와 괴롭혔던 왜적을 신라왕의 요청으로 광개토대왕이 물리친 사례가 광개토대왕릉비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고 고려말 경상도인근에서 약탈을 일삼던 왜구들을 최영 장군이 일망타진한 역사는 찾기 어렵지 않다. 특히 430년전 임진년 9월1일 있었던 초량목에서 부산진에 정박해 있던 왜선 100여 척 이상을 침몰시킨 부산대첩은 이순신 장군 스스로도 가장 큰 업적이라고 선조에게 알리고 있질 않는가?

이처럼 지금까지는 임진왜란 이후 부산에서 처절하게 당했던 패배의 역사를 알리는 데 힘을 쏟았다면 앞으로는 오랑캐를 부산앞바다에서 물리쳤던 감만의 역사도 함께 알아야 하질 않겠는가? 역사가의 고증을 통해 당시 동래부와 부산진 포함 경상도에서 쳐들어오는 왜적을 박살냈던 승리의 역사도 함께 알려 형평성을 유지했으면 한다. 작년부터 세계 제조강대국 순위에서 일본을 추월한 우리나라가 아직도 일본 앞에서는 약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은 미래를 개척해 나가야하는 MZ세대들에게 좋은 교육 모습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기성세대는 물론, MZ세대까지 포함해 감만의 역사를 찾아나설 원정대를 만들어 찾아 나서자. 부산을 시작으로 울산, 경남은 해방 이후 60여 년전까지는 한 동네였으니 이 곳에서 당한 피맺힌 패배의 역사만큼이나 감만의 역사를 끌어모으면 수 천년 역사 속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으리라 본다.

이를 계기로 감만동 옆에 있는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도 ‘국립감만역사관’으로 이름을 바꿨으면 한다. 5000년 역사에서 시대를 대표했던 감만의 대명사, 영웅(광개토대왕, 최영장군, 이순신장군등)들의 동상도 함께 만들면 어떨까? 부산 바닷가가 잘 보이는 이 곳에서 국가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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