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당신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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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정 소설가

12월이다. 일 년의 마지막 달에는 늘 조급한 마음이 된다. 올해 하고 싶었던 일과 이루고 싶었던 것들이 죽은 물고기처럼 떠오른다. 지켜지지 못한 약속과 마무리하지 못한 계획들 앞에서 서성이게 된다. 그런 마음을 아는 것처럼 인터넷 서점에서는 연말이면 당신의 기록이라는 이벤트를 통해 지난 일 년간의 독서기록을 보여준다. 올해 초 나는 다시 성실한 독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좋은 작가는 좋은 독자이기도 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새겼다.

글을 잘 쓰는 방법에 대해서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기. 그래서 다시 내 목표는 많이 읽기였다. 공을 많이 던져본 투수가 되어 마운드에 서고 싶었다. 그러나 실천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몰라서 못 하는 일보다 알아도 못하는 일이 더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다.

올해 나는 인터넷 서점에서 34권의 책을 구입했다. 몇 권은 아이들 책이었고 또 몇 권은 선물을 위한 구입이었다. 34권은 8704페이지, 책장 1.6칸, 야구공 7개를 쌓는 높이라고 한다. 계획에 비해 아쉽다. 나는 심지어 그 책들을 다 읽지도 못했다.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마치 결승선을 앞두고 마지막 힘을 끌어모으는 운동선수처럼 나는 책장 앞을 서성거렸다. 지난 게으름을 상쇄할 만한 책. 한 권만으로 충분한 올해의 책을 찾아 읽고 싶었다. 나는 그런 책을 ‘절대 책’이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는 인생 책.

그런 책이 있다. 이 책을 읽어서 나의 올해가 좋았다는 느낌이 드는 책. 좀 과장을 더하면 이 책을 읽지 못하고 죽었더라면 정말 안타까울 뻔했다는 생각이 드는 책. 왜 이제 내 앞에 나타났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책. 내 첫 인생 책은 〈열네 살 영심이〉였다. 같은 반 친구들과 돌려 읽었던 만화책이었다. 예쁘지 않은 영심이가, 짝사랑만 하는 영심이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영심이가 좋았다. 늘 꿈을 꾸는 영심이가 좋았다. 무엇보다 또래의 영심이가 너무 나 같아서 놀랐다. 책이 내 얘기를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처음 받았다.

물론 지금 그 책은 내 인생 책이 아니다. 이후로 인생 책의 자리를 다른 책들이 채우고 또 내주기도 하면서 나는 읽는 사람이 됐다. 대학 때는 오정희의 〈유년의 뜰〉 〈중국인 거리〉가 인생 책이었다. 가방 안에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늘 들어있던 시절도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갈 때 이상하게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이 들면 이성복 시인의 시를 읽었다. 몇 년 전에는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이 내 인생 책이었다. 이탈로 칼비노와 줌파 라히리, 앤드루 포터, 이후로도 계속해서 작가와 책들이 내게로 왔다. 올해 초 시몬 드 보부아르의 〈아주 편안한 죽음〉을 아주 느리게 읽었다. 최근에 읽은 모하메드 음부가르 샤르의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도 좋았다. 이렇게 보니 모두가 다 내 인생 책 같다.

책을 읽는 일에는 매번 도전과 기대가 필요하다. 그 책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되도록 실패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갈등하게 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책을 읽기 전 상태다. 의심은 대부분 첫 문장을 읽고 나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직 책의 문장과 내용들이 그것들을 다 무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것이 매혹이든 절망이든지 말이다. 하지만 인생 책들이 없었다면, 그 책들에서 맛보았을 빛나는 환희가 없었다면 나의 도전은 어려웠을 것 같다. 그렇게 지나온 내 인생 책들이 앞으로의 인생 책들을 마중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책들이 욕심을 부린다고 한꺼번에 내게 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겠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아야겠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 인생의 기록에는 다양한 시도와 실패, 후회가 더 많을 것 같다. 마음처럼 되는 일은 없지만 늘 꿈을 꾸는 열네 살 영심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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