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회로를 만드는 사람” 1cm 빈 공간이 만드는 ‘환영’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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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갤러리 14년 만에 이기봉 개인전
부산·서울점에서 31일까지 동시 개최
캔버스 위에 투명 막 올린 안개 풍경
물속 개념·텍스트 해체 품은 신작도
회화, 세상의 시스템 보여주는 ‘기계’

이기봉 'Where You Stand Green-1'. 국제갤러리(ⓒ안천호) 제공 이기봉 'Where You Stand Green-1'. 국제갤러리(ⓒ안천호) 제공

환영. 캔버스 위에 올린 투명한 막, 그 사이에 생긴 빈 공간에서 환영이 만들어진다. 이기봉 작가는 “막 없이 세상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어떤 존재를 인식하기까지 망막 등 인간을 구성하는 수많은 막과 자연 속 여러 막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개에 가린 몽환적 풍경을 담은 이 작가의 작품은 캔버스와 그 위에 올린 투명한 폴리에스테르 섬유에 각각 그려진 두 개의 이미지가 겹친 결과이다. “이쪽 막과 저쪽 막 사이 1cm의 공간이 환영을 만들어 내는 거죠.” 두 개의 막은 상상 속에 있을지 모를 수많은 막을 대변한다.

이기봉 작가. 국제갤러리(ⓒ안천호) 제공 이기봉 작가. 국제갤러리(ⓒ안천호) 제공
이기봉 'Where You Stand D-1'. 국제갤러리(ⓒ안천호) 제공 이기봉 'Where You Stand D-1'. 국제갤러리(ⓒ안천호) 제공

자욱한 안개 속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물가 풍경. 물과 안개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에 있는 작업실 환경에서 시작됐다. “안개는 습기 때문에 생기죠. 세상에 보이지 않는 흐름, 물기가 어떤 흐름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안개는 감각이나 지각을 교란하는 물질로서, 자연의 흐름을 깊이 인식시키는 존재이다. 작품에서 안개와 물은 ‘환영’을 끌어내는 중요한 핵심 포인트다. 같은 안개지만 초록색 풍경 작업은 시선을 안으로 빨아들이고, 짙은 회색 풍경은 그림 속 사물의 존재를 밖으로 드러나게 만든다. 작가는 “작업을 하다 보면 어떤 특성이 스스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이기봉 'Black Shadow-The Void'. 국제갤러리(ⓒ안천호) 제공 이기봉 'Black Shadow-The Void'. 국제갤러리(ⓒ안천호) 제공
이기봉 'Passage to Illogic A'. 국제갤러리(ⓒ안천호) 제공 이기봉 'Passage to Illogic A'. 국제갤러리(ⓒ안천호) 제공

해체. 이번 전시의 신작에서는 세상의 일부 또는 전부가 물에 비친 모습이 보인다. 레진으로 만들어진 거친 표면, 붓 대신 물을 쏘아서 탈락시키고 남은 파편들이 ‘해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그림자 개념이 있다”고 했다. “그림자놀이 같은 거죠. 다른 사람 눈에는 어두워 보일 수 있지만 제 눈에는 다채로워요.”

신작 중 일부에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서 발췌한 텍스트가 압축된 형태로 등장한다. 작가는 “(언어의 의미를 사라지게 만든) 무의미한 층을 더해서 (화면 위에서) 다시 무의미하게 풀어버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잠시 의미로 잡아두지만 결국 흘러가요. 무상의 시스템, 이 세계가 무상을 창조하는 거대한 기계처럼 느껴졌어요.”

국제갤러리 서울점의 이기봉 작가 전시 전경. 오금아 기자 국제갤러리 서울점의 이기봉 작가 전시 전경. 오금아 기자
섬유 막 위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서 발췌한 텍스트가 깔려 있다. 오금아 기자 섬유 막 위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서 발췌한 텍스트가 깔려 있다. 오금아 기자

회로. 이 작가는 자기 작품이 이런 세상의 시스템을 보여주는 장치가 되기를 바랐다. “회화는 일종의 기계입니다.” 그에게 회화는 뇌 안의 이미지, 뇌 안의 현상, 뇌가 조작해 내는 허구를 연출하는 기계이다. “저는 그림을 그린다기보다는 회로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가 만든 회로를 통해 환영이 만들어질 때 뭔가 좀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죠.”

이기봉 개인전 ‘웨어 유 스탠드(Where You Stand)’는 국제갤러리 부산점(수영구 망미동)과 서울점(종로구 소격동)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이 작가가 국제갤러리에서 14년 만에 선보이는 다섯 번째 개인전이다. 부산점에서만 볼 수 있는 ‘디퍼 댄 섀도(Deeper than Shadow)’ 연작은 초록색, 보라색, 회색 세 점으로 구성된다. 캔버스와 막 사이에는 물속 세계를 표현한 듯 실제 나뭇가지 등이 들어 있다.

이기봉 'Deeper than Shadow-Purple'. 국제갤러리(ⓒ안천호) 제공 이기봉 'Deeper than Shadow-Purple'. 국제갤러리(ⓒ안천호) 제공
이기봉 작가의 작품 표면. 오금아 기자 이기봉 작가의 작품 표면. 오금아 기자

이 작가는 ‘너는 어디에 있는가’를 뜻하는 전시 제목은 ‘무엇을 가지고 인식하는가’ ‘제대로 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이어진다고 했다. “결국 그림자를 가지고 인식하는 거거든요. 내가 서 있는 곳의 그림자, 내가 서 있는 곳의 파편들을 보는 거예요. 예술가는 팬텀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제 작품이 팬텀을 만들어내는 기계였으면 좋겠어요.” ▶31일까지 국제갤러리 부산점·서울점 K1/K2.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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