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이건희컬렉션'을 보고 와서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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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문화부장

부산시립미술관 지역순회전 개최
박수근·김환기·천경자·유영국 등
근현대미술 대표작 100여 점 선봬

수도권 집중된 문화 불균형 해소
지역민 향유의 장으로 자리매김
더 확대해 문화 균형발전 이뤄야

2일 찾은 부산시립미술관 1층 로비는 활기가 넘쳤다. 부산일보사와 부산시립미술관이 공동주최하는 이건희컬렉션 한국 근현대 미술 특별전 ‘수집: 위대한 여정’을 보러 온 시민들로 북적였다. 며칠 전 부산시립미술관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한 뒤 받은 문자를 안내 데스크에 보여 주고 입장권을 받았다.

3층 전시장으로 들어가자 권진규, 김기창, 김환기, 박고석, 박래현, 박수근, 오지호, 유영국, 이대원, 이상범, 이인성, 이중섭, 장욱진, 천경자 등 한국 미술사 주요 거장들의 주요 시기 작품 100여 점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지역에서 한국 근현대 미술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국립현대미술관·대구미술관·전남도립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컬렉션을 비롯해 리움미술관, 고려대박물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뮤지엄 산, 가나문화재단 등 컬렉터들의 애장품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압권은 이건희컬렉션이었다. 이건희컬렉션은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생전에 수집한 미술품과 문화재다. 이건희 회장 유족 측이 지난해 4월 문화재와 미술품 총 2만 3000여 점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등 국공립 기관에 대거 기증하며 한국 공공컬렉션의 새 역사가 열렸다.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1957년)에 많은 이들의 시선이 머물렀다. 아기를 업은 채 일하는 여인을 모습을 담았는데 박수근 작품 중 보기 드문 대작(130cm·97cm)이다. 국민화가 박수근이 우리나라에 흔한 화강암 재질을 작품의 마티에르로 승화시켜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색채로 구현했다.

도슨트로부터 주요 전시작에 대한 해설을 들으니 작품 이해도가 훨씬 높아졌다. 천경자의 ‘누가 울어2’(1989년)는 작가가 65세쯤 미국 중서부 여행을 마치고 그린 작품인데 가수 배호의 노래 ‘누가 울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천경자는 사랑의 애절함을 담은 배호 노래를 매우 좋아해 노래 제목을 작품 제목으로 썼다.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한국 화단의 모더니즘 전개에 앞장선 김환기의 대형 전면 점화 ‘작품 19-Ⅷ-72 #229’은 시선을 압도했다. 복잡한 숫자의 배열로 보였던 작품 제목에 대한 궁금함은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 완전히 해소됐다. 1972년 8월 19일 완성됐으며, 김환기 화백의 229번째 작품이란 뜻이었다. 글과 그림에 능통했던 김환기는 문학을 좋아하고 서정성이 넘쳤다고 한다. 근현대문화계의 ‘핵인싸’였던 김환기는 김광균, 서정주, 조병화, 김광섭 등 여러 시인과 가깝게 지냈다. 김환기는 김광섭 시인을 마음속 깊이 존경했다고 한다. 김환기 화백은 김광섭 시인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라는 시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김 화백이 이전 작업과 달리 점을 찍으면서 시작한 작업의 출발점이자 모노크롬 회화의 시조라는 상징성을 지닌다.

이번 전시는 지난달 11일 부산시립미술관에서 개막했는데 개관 1시간 전부터 대기 줄이 생길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달 27일 기준 1만 5000여 명이 전시를 관람했다. 내년 1월 29일까지 무료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이건희 컬렉션 지역순회전’으로 마련된 것이다.

‘이건희 컬렉션 지역순회전’은 올 10월 초 국립광주박물관과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시작됐으며 2024년까지 전국의 박물관·미술관에서 진행된다. 경남도립미술관은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영원한 유산’ 전시를 10월 28일 개막해 내년 1월 25일까지 연다. 올해는 광주와 부산·경남지역에서 열리며, 내년에는 대전을 비롯한 7개 지역, 2024년에는 제주를 비롯한 3개 지역에서 순회전이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24년 이후에는 지역 수요와 상황 등을 고려해 순회전 확대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각 지역미술관은 ‘이건희컬렉션 한국근현대미술 특별전’ 국립현대미술관 업무 협약에 따라 엄선된 명작 50여 점과 기타 작품들을 각 기관 상황에 맞춰 전시한다.

이번 부산 전시를 비롯한 지역순회전은 그동안 수도권에 집중됐던 지역 간 문화 불균형을 해소하고 비수도권 국민도 문화를 즐겁게 향유하는 장이 됐다. 올 8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을 관람한 적이 있다. 그때 화려한 전시 작품에 대해 감탄하면서 ‘서울에 굳이 가지 않고 지역에서도 이런 전시를 자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수도권에 비해 문화 인프라가 열악하고 문화적 향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비수도권에는 이번 지역순회전과 같은 기회는 더욱 확대돼야 한다. 이번 전시가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사는 지역에 차별받지 않고 수준 높은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는 ‘문화 국가균형발전’을 앞당기는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한다.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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