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지도에서 사라진 마을 '완월동'

이자영 기자 2you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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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영 기획취재부 차장

일제 강점기 ‘녹정 유곽’으로 출발
100년도 넘은 부산 성매매 집결지
여성단체 ‘살림’ 아카이빙 활동 의미
역사 기록 위한 지자체 지원 필요도

속칭 ‘완월동’.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매매 집결지. 부산 서구 충무동과 초장동 일대에 걸쳐 있는, 부산의 마지막 남은 홍등가. 정식 행정 지명이 아니라 지도에선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이름.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이곳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보는 자리가 지난 6일 마련됐다. (사)여성인권센터 ‘살림’이 창립 20년을 맞아 ‘완월기록연구소’와 함께 ‘완월동 성매매 집결지의 역사적 의미와 현재’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행사가 열린 장소는 부산진구 부전동에 위치한 ‘이젠센터’. 부산시 여성폭력방지종합지원센터로, 올 9월 문을 열었다. 한국전쟁 이후 하야리아 부대 기지촌으로 생겨난 ‘범전동 300번지’가 있던 곳 바로 인근이다. ‘해운대 609’와 함께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성매매 집결지 ‘300번지’를 코앞에 두고 열린 행사라 더 뜻깊다는 평가가 나왔다. 비교적 도심 접근성이 높은 범전동 300번지와 해운대 609는 재개발 사업으로 폐쇄됐지만, 완월동에선 여전히 25곳의 성매매 업소가 영업 중인 것으로 살림 측은 파악하고 있다.


토론회 발제자로 참여한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은 “일제 강점기 시내 중심가에 있던 유곽을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녹정’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이곳은 해방 후 1947년 완월동으로 개명됐다. 1980년대 충무동 2가와 3가로 다시 개명됐다”고 설명했다. 김 소장은 오래된 지도 자료와 사진을 통해 완월동의 과거를 드러냈다. 1910년에 발행된 ‘최신 부산항시가도’는 완월동 일대를 ‘신(新) 유곽지’로 표기하고 있다. 1914년에서 1915년 사이 발행된 부산 지도에는 ‘녹정’이라는 유곽 이름이 등장한다. 110년도 더 된 완월동의 역사가 옛 지도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완월동에서 2015년 문화예술축제 ‘완생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송진희 문화기획자는 이곳을 ‘(성)구매자, 포주, 상인이 되지 않고서는 접근하기 힘든 공간’이자 ‘여성들의 목소리를 차단하는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그동안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지도, 목소리를 내지도 못했던 성매매 여성들. 살림은 성매매 경험 당사자 모임 ‘나린아띠’와 함께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한 책 〈뻔하지도 펀(FUN)하지도 편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펴내고 지난달 비공개 북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저자로 참여한 닉네임 ‘백치’는 탈성매매의 이유로 ‘죽는 게 두려워서’를 꼽았다. ‘단지 그냥 살고 싶었다’는 그는 탈성매매 후에도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 구매자와 마주칠까 땅만 보고 걷는 내 모습,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업주와 삼촌들, 사채업자, 소개업자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나를 섬으로 팔아버릴까 두려움에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썼다. 그는 살림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 기회가 생겼다’고 했다. 2002년 12월 6일 성매매 피해여성 지원센터로 문을 연 살림이 이름처럼 탈성매매 여성을 ‘살린’ 이야기가 책 속에 담겼다.

이송희 부산여성사회교육원 이사는 20년 전 살림의 등장을 “부산 지역 진보 여성운동의 축적 결과”라고 평가하면서도 “초기 정경숙 대표를 비롯한 주체 세력의 강한 추진력이 없었다면 운동의 전개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전 대표는 현재 완월기록연구소 소장을 맡아 성매매 집결지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완월 아카이브’라는 온라인 기록관을 여는 성과도 있었다.

‘빨간집’의 배은희 기록활동가는 “완월 아카이브가 한 번 기록물을 모은 활동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지속될 수 있게끔 하는 업데이트 작업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시민 아키비스트로 참여했던 임미화 씨는 “전북 전주 선미촌에 갔을 때 성매매 집결지가 사라지고 아카이브관과 성평등 교육관, 사회적기업, 창작과 예술의 현장으로 탈바꿈한 것에 감동 받았다”며 “개발과 돈벌이의 대상이 아니라 아픈 역사를 성찰하고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 공간을 기억하는 방식이 좋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장 활동가들의 바람과 달리 완월 아카이브 관련 예산은 최근 부산시의회에서 전액 삭감됐다. 변정희 살림 대표는 “주민참여예산제, 시정 협치 사업으로 편성됐던 예산이 애초 2억 원에서 1억 2000만 원까지 줄어들더니, 시의회 상임위를 거치면서 아예 사라졌다”며 “주민 반대를 앞세워 부끄러운 역사를 지우려는 시의회가 대변하는 주민은 대체 누구냐”고 반문했다. 일제 강점기와 미 군정을 거쳐 100년 넘게 이어져 온 끈질긴 성 착취의 역사. 완월동이 재개발 된다 해도 그 역사는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끄러운 역사라 할지라도 제대로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지자체의 책무가 아닐까.


이자영 기자 2you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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