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2호기 환경평가 ‘부실한 옛 미국 지침’ 적용했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탁경륜 기자 ta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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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 설계 연한 채운 ‘노후’ 불구
중대사고 빠진 ‘구식 지침’ 준용
최초 공개 평가서 초안서 드러나
수명 연장 갈등 장기화, 불안 확산

고리 2호기 전경. 부산일보DB 고리 2호기 전경. 부산일보DB

수명 연장(계속운전)을 추진 중인 고리2호기의 방사선환경영향평가서에 중대사고가 빠진 부실한 구식 미국 지침서를 준용한 정황이 포착됐다. 수명설계 연한을 꽉 채운 노후 원전인데도 선진국 수준의 강화된 안전 기준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아 시민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11일 〈부산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올 7월 한국수력원자력이 처음 공개한 고리2호기 방사선환경영향평가서 초안에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NUREG-0555’를 준용했다고 언급한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은 원전 안전·규제 기준이 가장 앞선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NUREG-0555는 1979년 개발된 원전 환경영향평가 심사 지침서로, 중대사고 등에 대한 내용이 빠진 ‘구식 지침서’다. 중대사고가 반영된 건 1999년 개발된 ‘NUREG-1555’다. 한수원은 이후 추가 공람을 앞두고 평가서 내용에서 NUREG-0555 등 미국의 심사지침서 부분을 빼고 국내 규제심사지침을 따른다고 바꿨다.

한수원이 고리2호기 안전에 대한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보여 주기식으로 미국 지침서를 가져왔다는 비난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한병섭 원자력안전연구소 소장은 11일 “지난달 말 울산에서 한수원은 NUREG-0555를 기본으로 하고, 1555를 가미했다고 발표했다”며 “발전소를 지을 당시 중대 사고에 대한 대비가 제대로 안 돼 있었기 때문에, 수명 연장은 반드시 1555가 기본이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수원은 최근 주민 공청회 질의와 〈부산일보〉 취재에 뒤늦게 “NUREG-1555 기준 요건도 모두 충족하고 있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를 충족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수원 관계자는 “중대사고가 아닌 부분도 고려하다 보니 0555가 그대로 쓰인 것 같은데, 오기인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평가서가 기준으로 삼은 국내 규제심사지침에도 1555의 중대사고 평가 기준, 완화 대안 등 모든 요건이 반영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 미국 원전의 수명 연장 때 쓰인 환경영향평가서를 분석한 결과, 중대사고 관련 시나리오와 대응 방안 등이 고리2호기의 평가서와 수준 차이를 보였다. 환경단체는 방사선이 외부로 누출되는 우회사고, 시나리오를 통한 지진 영향, 항공기 추락 대비 등에 대한 중대사고 분석이 부실하다고 지적한다.

또 한수원의 주장처럼 1555를 0555로 잘못 표기했다 하더라도 '부실 평가서'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이처럼 고리2호기 안전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수명 연장 갈등은 장기화할 것으로 보인다. 내년 4월 운영허가가 만료되는 고리2호기는 그간 67번의 잦은 고장으로 불안감을 키웠다. 지난 38년 동안 ‘재가동 승인 후 3개월 이내 정지’ 건수도 국내 원전 중 27건으로 가장 많다. 탈핵단체는 부실 평가를 막기 위한 소송을 검토 중이다.

부산시는 갈등이 격화하는 데도 오는 22일 시청에서 공개 토론회를 계획하는 등 뒤늦게야 움직임을 보인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고리2호기 수명연장에 대해 과학적 검증과 함께 공론화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지만 실제 추진 과정에서는 명확한 입장을 드러내지 않아 뒷짐을 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부산시 원자력안전과 관계자는 “한수원에 토론회 개최 의사를 전달했으나 아직 참석 여부에 대해 답변을 받지 못했다”며 “정식으로 공문도 보내 참석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탁경륜 기자 ta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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