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익의 참살이 인문학] 노란 목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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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칼럼니스트

나는 평생 배우고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학문과 공부가 직업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정년을 맞아 물러난 지금 과연 제대로의 학문과 공부를 했는지 물으면 무척 궁색해진다. 학문(學問)의 문자 그대로의 뜻이 ‘배우고(學) 묻는(問)’ 것이니 그거라면 나름 열심히 했노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학문으로 역사와 현실을 치열하게 공부(工夫)했는지 물으면 역시 무척 부끄러워진다. 지금은 공부가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學習)으로 축소되었지만, 이 말의 기원인 불교와 유교에서는 불법과 세상의 이치를 증험(證驗)하고 그것을 인격으로 내면화하는 수양과 실천의 의미가 더 강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에게 학문과 공부는 이미 주어진 지식을 습득하여 간직하는 것일 뿐이다. 배움은 있되 물음이 없는 학문이며 익힘은 있되 증험이 없는 공부다.

약육강식으로 세상사 다 설명 안 돼

아픔 나누는 마음이 더 원초적 본성

함께하는 수양과 실천이 진짜 공부

평생 진리로 믿어 온 세상의 이치 중 ‘보이지 않는 손’이란 것이 있다. 누구나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이며 그런 개인들의 이기심이 모여 질서가 생긴다는 경제학의 제일 원리라고 배웠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는 약육강식(弱肉强食)도 배웠고, 자연 상태에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의 적이 되므로 질서를 잡아 줄 절대 권력을 세웠다는 사회계약에 대해서도 배웠다. 다양한 형질 가운데 환경에 적합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자연선택은 적합하지 못한 개체는 당연히 사라져야 한다는 자연‘도태’로 배웠다. 그리고 최근에는 우리 모두 이기적 유전자가 조정하는 생존 기계일 뿐이라는 충격적 주장이 우리의 의식을 사로잡고도 있다.

과연 역사와 현실에는 이기적이고 잔혹한 인간들이 득세해 온 사례가 차고 넘친다. 고대의 전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약한 자들을 죽이고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는 약탈이 주목적이었다. 기독교인들을 콜로세움에 던져 사자 밥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열광했던 로마인들을 보면 잔혹이 인간의 본성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정적의 티끌만 한 허물은 태산만큼 부풀리면서 자신들의 태산 같은 허물은 티끌로도 여기지 않는 권력자는, 어떤 양심의 가책도 없는 순진한 얼굴로 법의 이름으로 약한 자들을 찌른다. 헌법에 보장된 쟁의행위에 대해서는 강제진압과 엄청난 액수의 손해배상 소송으로 맞서면서도 사용자의 비리와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한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약육강식과 보이지 않는 손은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는 삶의 문법이다.

이러한 냉혹함 속에서도 어려운 이웃의 아픔과 슬픔을 나누는 마음들이 있어 이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한 곳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따뜻한 마음은 보이지 않는 손이나 약육강식의 ‘논리’보다 훨씬 더 원초적인 우리의 ‘본성’이라는 증거가 늘어나고 있다. 우리 속 원숭이 두 마리를 투명한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게 한다. 그중 한 마리의 머리 위에는 잡아당길 수 있는 끈이 드리워져 있는데 이것을 당기면 자기 앞에 먹이가 나오지만 마주 보고 있는 동료가 앉아있는 바닥에는 전류가 흐르게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 원숭이는 한두 번 끈을 당겨 먹이를 얻다가, 그때마다 아파하는 동료를 보고는 이내 먹이 구하기를 멈춘 채 며칠을 굶는다고 한다. 원숭이가 이렇다면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보이지 않는 손’이란 말을 지어낸 애덤 스미스는 우리가 오해하듯이 그 말로 냉혹한 경제 논리를 옹호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서로의 아픔을 나누는 도덕 감정을 강조하는 도덕철학자로 기억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자연선택이라는 생명 진화의 원리를 발견한 다윈도 약육강식이 자연의 법칙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 보이지 않는 손이나 약육강식이라는 구호는 학문은 하되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체제의 옹호자들이 만들어 낸 허구일 뿐이다.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리던 하청 노동자들이 벌인 점거 농성에 대해 470억 원이라는 거액의 배상을 청구한 회사가 있다. 한편 국회에서는 정당한 파업과 쟁의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할 수 없도록 하는 ‘노란봉투법’이 심의 중이다. 그리고 여기 내가 사는 경남 양산의 한 아파트 작은 도서관에는 이 법이 통과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한 땀 한 땀 노란 목도리를 뜨는 사람들이 있다. 학문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세상 공부만큼은 확실히 하는 사람들이다. 강한 자는 힘으로 싸우지만 약한 자들은 돌봄의 연대로 버틴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은 것을 이긴다’(弱之勝强 柔之勝剛)는 도덕경의 역설은 이렇게 불가능을 꿈꾸며 세상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반복적으로 느끼는 것이지만 혼자 하는 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니다. 함께하는 작은 수양과 실천이 진짜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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