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홍합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취한 속 씻어내려고 홍합을 삶는다/ 시원한 국물 맛에 쓰린 속 조금씩 풀리고/ 구겨졌던 시간들도 허리를 펴는데/ 남의 속은 풀어주면서/ 제 속 풀지 못하는 홍합의 눈물….” (권천학의 시 ‘홍합’)

오늘부터 날씨가 다시 영하권으로 떨어지면서 본격적인 겨울 추위가 시작됐다. 이때쯤이면 떠오르는 제철 음식이 있다. 서민의 헛헛한 속을 뜨끈하게 달래 주는 홍합탕이다. 한때는 부산 해운대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병만 시키면, ‘담치 국물’이 무한 서비스로 나오기도 했다. 특유의 감칠맛과 시원한 맛으로 속풀이에 일품이다. 영남권에서는 담치로 주로 불리는 홍합은 ‘지중해 담치’가 진짜 이름이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만 서식하고, 양식이 되지 않은 ‘참담치’도 있다. 해녀나 잠수부가 주로 채취하다 보니 비싼 값에 거래되지만 맛과 향은 비할 데가 없을 정도다.

홍합은 현생 인류가 생존하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7만 4000년 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토바 화산이 지구 역사상 가장 큰 폭발을 일으키면서 회색 화산 먼지가 하늘을 뒤덮었다. 햇빛이 지표면에 닿지 못해 북반구의 전체 식물 4분의 3이 사라졌고, 초식동물들도 굶어 죽어 갔다. 본격적인 빙하기였다. 호모 사피엔스가 생존했던 곳 중의 하나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남부 해안 피너클 포인트 동굴과 브롬보스 동굴이다. 동굴 안 조개더미(패총)에서는 홍합 등 조개류 잔해들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바다와 홍합이 멸종 위기에 처했던 인류의 조상을 살린 뜻밖의 먹거리였음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셈이다.

홍합은 몸에서 실이나 털 같은 발을 분비해 바위에 찰거머리처럼 무리 지어 부착한 뒤 거친 파도나 사람의 어지간한 간섭에도 꿈쩍조차 하지 않는다. 해양수산부는 최근 홍합의 이런 접착 단백질 소재가 갖는 원료 물질을 기반으로 뼈나 수술 부위 접착에 활용 가능한 ‘의료용 생체 접착제 제조 기술’을 ‘2022년 하반기 해양수산 신기술(NET)’로 인증했다. 향후 의료용 접착제와 봉합사 등 세계 시장 석권도 기대된다고 한다.

호모 사피엔스의 먹거리였던 홍합이 이제는 의료바이오 소재로 개발돼 인류에 또다시 기여하는 모양새다. 바다를 끼고 있는 해양수도 부산의 대학과 기업, 연구소에서 이런 해양바이오 기술 개발과 특허 출원, 시장 개척이 대대적으로 이뤄졌으면 좋겠다. 경제 빙하기에 국가와 지역의 움츠린 속마음을 후끈하게 풀어 주고, 버틸 힘을 주는 해양바이오 전성시대가 오기를 바란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