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으로 보는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2. 박고석과 이중섭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수제비’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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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광복동 밀다원에서 우정 나눈 두 친구
피란시대 꽃피운 예술·삶이 주는 진한 감동

박고석의 '풍경'(1954, 뮤지엄 산 소장).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박고석의 '풍경'(1954, 뮤지엄 산 소장).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예술은 위기 속에서 태어난다.’

한국전쟁 시기 부산은 피란 수도로 피란민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당시 많은 예술가가 부산으로 피란을 왔다. 생계조차 이어가기 힘든 암울한 상황이었지만, 예술가들은 어려운 시대를 예술창작의 기회로 삼고 치열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박고석과 이중섭, 두 작가는 부산 피란 시절에 만나 작고하는 순간까지 남다른 우정을 나누었다.

박고석(1917~2002)은 ‘산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야수파 또는 표현주의 경향의 화풍으로, 한국의 산이 지닌 다채로운 색감을 격정적인 필치로 그렸다. 평양에서 태어난 박고석은 일본으로 유학 가서 서양화를 배우고 자신만의 ‘자유로운 필법’을 구축했다. 1960년대 추상회화를 그리기도 했으나, 이내 추상회화에 회의감을 가졌다. 박고석은 잠시 창작을 멈추었다가 구상 화풍의 작품을 그렸다. 당시 박고석은 등산을 자주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국의 유명한 산을 누비며 눈에 담은 한국의 아름다운 풍광은 박고석만의 독특한 풍경화로 다시 탄생했다.

박고석 '외설악'(198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박고석 '외설악'(198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이중섭(1916~1956)은 ‘한국인이 사랑하는 국민화가’이다. 그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으나, 사후 독창적 작품 세계가 재평가되며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대표 작가가 됐다. 평안남도 출신인 이중섭은 고구려 고분벽화, 민화 등 전통미술에서 영감을 받았다. 고구려 벽화가 지닌 태고의 느낌을 작품에 살리기 위해 거칠고 과감한 표현 기법을 사용했다. 은지화 또한 고려자기의 상감기법, 은압사 기업 등을 응용했다고 한다. 또한 닭·가족·개구리·황소 등 자전적인 소재에 몰두해 작품을 그렸는데, 해학적 요소를 겸비한 이중섭만의 격조 높은 예술 양식을 완성했다.

박고석의 대표작 ‘범일동 풍경’(1951)은 부산 피란 시절 그린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뮤지엄 산 컬렉션의 ‘풍경’(1954) 또한 전쟁 후 암울한 시대상을 화면에 담아냈다. 제작 시기로 보아 부산 시절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어둡고 혼란스러운 도시의 풍경은 마치 작가의 내면세계를 반영한 것 같다. 치열한 삶의 무게를 붓으로 표현한 듯 격정적인 필치가 화면을 이룬다. 이 작품에서는 비극적 상황에서도 작업을 이어가고자 하는 창작 의지가 느껴진다.

이중섭 '오줌싸개와 닭과 개구리'(1950년대 초반,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이중섭 '오줌싸개와 닭과 개구리'(1950년대 초반,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이중섭 ‘오줌싸개와 닭과 개구리’(1950년대 전반)도 유사한 시기에 제작된 작품이다. 그림 속 인물의 수염으로 보아 닭을 향해 오줌을 누는 장난기 넘치는 남자는 작가 자신인 듯하다. 오줌에 화들짝 놀라 도망가는 암수 닭 한 쌍과 그것을 빤히 지켜보고 있는 개구리가 천진하면서도 유쾌한 화면을 이루고 있다. 이중섭은 소를 그린 작가로 유명하지만 닭도 자주 그렸다. 닭은 아내 마사코 여사와의 짧지만 행복했던 신혼 시절을 떠올리는 가정의 상징이자, 닭띠인 아내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는 도상이다.

박고석과 이중섭 두 작가 모두 이북 출신이며 1930~40년대 일본에서 유학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전의 친분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은 광복동 밀다원 다방에서 처음 만나서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한묵과 함께 삼총사로 어울리며 힘든 피란 생활의 동지가 되었다고 한다. 1955년 박고석은 피난 생활을 끝내고 서울 정릉으로 작업실을 옮겼는데, 이중섭과 한묵도 그를 따라 정릉에 살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박고석은 이중섭의 사후 유골 3분의 1을 가지고 있었을 만큼 남다른 우정을 보였다.

이중섭 '바닷가의 연인'(1941,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이중섭 '바닷가의 연인'(1941,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피란 시절 박고석 작가는 문현동 고개 근처에서 생계를 위해 카레라이스 장사를 했다고 한다. 이중섭이 동업을 제안했으나, 실제로 대부분의 장사는 박고석의 몫이었다. 1950년대 이중섭은 가족을 일본에 보내고 혼자 부산에서 생활할 때였다. 그래서인지 박고석의 집에 자주 드나들며 미군 부대에서 주운 담뱃갑을 뜯어 그린 은지화나 가족에게 쓰다가 구겨버린 편지를 버려 놓고 며칠씩 사라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한다.

박고석의 아내 김순자 여사는 힘든 살림에 동료 화가들에게 베풀기만 하는 남편과 이중섭 작가가 달갑게 보이지 않았을 수 있다. 김 여사는 은지화와 엽서, 먹다 남은 땅콩 껍데기 등을 땔감으로 해서 수제비를 끓여 먹었다고 한다. 이들이 먹었던 수제비의 가치를 따져본다면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수제비’가 아니었을까 싶다.

박고석과 이중섭은 각자 작품세계를 이루었지만 두꺼운 윤곽선과 격정적인 붓질, 강렬한 색채 등 예술적인 면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자연주의 화풍으로 한국의 풍경을 자신만의 정취로 담아낸 박고석.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 이중섭. 격랑의 시대를 살아간 그들의 삶은 작품으로 남아 관람객에게 진한 감동을 전한다.

김경미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정리=오금아 기자)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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