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무인점포 절도범 잡으러 갔다가 생필품 보태 주고 온 경찰

나웅기 기자 wonggy@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범천동서 16회 8만 원어치 절도
잡고 보니 정신장애 50대 여성
남편도 정신장애라 생활고 심해
덜 아픈 아내, 고시원 복도 생활
훔친 컵라면으로 겨우 끼니 해결
체포하러 간 형사들 되레 충격

CCTV 영상 속 50대 여성은 멈칫거렸다. 이달 초 어느 날 오전 6시께 매서운 바람을 뚫고 부산 부산진구 범천동 한 무인 편의점에 들어선 여성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컵라면과 생수 병을 챙겼다. 잠시 머뭇거리던 여성은 결심한 듯 그대로 카운터를 지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상주 직원 없이 운영되는 점포이다 보니 결제를 하지 않고 나가도 말릴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가져간 컵라면과 생수는 만 원어치 정도였다.

이 여성은 10여 일 동안 16번이나 무인 점포에 들어가 컵라면과 생수 등을 가져갔다. 절도 행각은 여러 차례였지만, 피해 금액은 다 합쳐서 8만 원 남짓. 한 번에 가져가지 않고 여러 번 조금씩 가져간 걸 봐서 끼닛거리 떨어질 때마다 물건을 훔친 것 같았고, 잡히기 좋게 같은 장소에 계속 온 것으로 봐 초보 절도범인 듯했다. 당연히 점포 측은 경찰에 신고했고, 부산진경찰서 소속 형사들은 어렵지 않게 절도범의 인적 사항을 특정할 수 있었다.


평범한 생계형 범죄라고 생각하고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50대 여성 A 씨를 체포하러 갔다. 하지만 거주지에 다다르면서 형사들은 마음이 점점 무거워짐을 느꼈다고 한다. 형사가 찾은 고시원은 여인숙을 개조한 낡은 쪽방 수준의 주거지였다. 한겨울 칼바람이 건물 안으로 파고들어 와,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를 더 싸늘하게 했다.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복도 끝 1.5평 정도 작은 방에서 A 씨와 남편인 60대 B 씨를 찾았다.


무인 점포에서 라면과 생수를 훔친 50대 A 씨가 부산의 한 고시원에서 붙잡혔다. A 씨가 주로 잠을 잤던 고시원 복도. 부산진경찰서 제공 무인 점포에서 라면과 생수를 훔친 50대 A 씨가 부산의 한 고시원에서 붙잡혔다. A 씨가 주로 잠을 잤던 고시원 복도. 부산진경찰서 제공

방에는 컵라면과 약간의 쌀, 물 몇 통만 나뒹굴고 있었을 뿐, 식사를 제대로 한 흔적이 없었다. 난방이 되지 않아 방은 냉골이었다. 신원을 확인한 경찰은 범행 관련 질문보다 “방이 너무 추운데 몸이 괜찮으시냐”고 먼저 물었고, 그나마 몸이 덜 아픈 부인이 복도에서 이부자리를 펴고 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경찰 조사 결과, 두 사람 모두 정신장애로, 당장 끼니 해결이 어려워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확인됐다. A 씨는 “가지고 가면 안 되는 걸 알았는데…. 배가 고파서 계산도 하지 않고 가져가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조사를 마친 부산진경찰서 형사들은 되레 각종 생필품 등을 마련해서 이들 부부에게 전달했다. 부산진경찰서 관계자는 “실제 피해가 발생했으니 법적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면서도 “사는 곳을 보고 나니 너무 안타까워 행정 기관에 연락을 하고 범죄에 내몰리지 않도록 도움을 주기로 했다”고 밝혔다.

외부 활동도 이웃과의 교류도 없던 이들은 누구보다 혹독하고 추운 연말을 보내고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과 관할 지자체에 따르면 이들 부부가 해당 고시원에 거주한 지 4년 정도 됐다. 이들 부부는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돼 있어 보조금을 받고 있지만 정신장애로 인해 체계적인 경제활동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A 씨 부부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이들이 늘어나면서 생계형 범죄 건수도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부산경찰청에 따르면 2019년 부산 전체 절도 발생 건수 중 생계형 범죄로 추정되는 10만 원 이하 소액 절도건 발생 비율은 26.7%를 기록했다. 2020년에는 32.2%로 오르더니 지난해에는 36.9%로 계속 증가하는 모양새다.

특히 등록장애인 중 정신장애인이 생활고를 심하게 겪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말 기준 국내에는 10만 4000여 명이 정신장애인으로 등록돼 있으며, 이들의 고용률은 10.9%에 불과하다.

관할 행정 기관은 경찰의 연락을 받고 뒤늦게 상황 파악에 나섰다. 주민센터 측은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이들 부부에 대해 사례 관리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할 뿐 정확한 실태 파악은 돼 있지 않았다.

주민센터 관계자는 “이들 부부는 한 달에 한 번 주기적으로 주민센터에 찾아오기도 했으며 지자체에서도 관심을 갖고 이들을 살피고 있었다”며 “조만간 가정방문을 통해서 추가로 이들을 도울 방법이 있는지 확인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웅기 기자 wonggy@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