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으로 보는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3. 동반자이자 라이벌, 김기창과 박래현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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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수 없는 화가’가 그린 농악의 역동성
실험정신 가득한 예술가의 현대적 한국화

김기창 '흥락도'(1957,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김기창 '흥락도'(1957,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한국화의 거장 김기창. 그리고 김기창의 아내로 알려져 있었으나 사후 한국화의 현대화를 이끈 여성작가로 그만의 독창적 작품세계가 재조명된 박래현. 이들은 한국화의 역사를 살펴볼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김기창과 박래현은 인생의 동반자로, 또 예술적 교감을 나누는 동료이자 라이벌로 평생을 함께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 운보 김기창(1913~2001)은 어릴 때 장티푸스에 걸려 후천적 청각장애를 가지게 됐다. 미술에 남다른 재주를 보인 김기창은 1930년 이당 김은호의 화숙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1931년 김기창은 조선미술전람회에 ‘판상도무’를 출품해 입선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운 지 1년 만에 당시 한국 미술사 전개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던 미술전람회에서 입선했다는 점에서 작가로서 김기창의 재능을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후 김기창은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며 화단에서 영향력 있는 작가로 입지를 굳혔다.

김기창 '유산의 이미지'(1960년대 초반, 가나문화재단 소장).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김기창 '유산의 이미지'(1960년대 초반, 가나문화재단 소장).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광복 후 1946년 김기창은 박래현과 결혼했다. 이때부터 그는 작품세계에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한국화의 현대화를 추구하며 일본 화풍에서 벗어난 새로운 양식을 시도하고, 일상적 풍경에 대한 화면의 재구성을 통해 자신만의 새로운 화풍을 구축했다.

‘수집: 위대한 여정’전에 출품된 ‘흥락도’는 농악을 즐기는 농민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농악은 음악과 역동적인 춤사위가 어우러진 종합예술이지만, 음악을 들을 수 없는 김기창의 눈에는 농민들의 격정적인 몸동작이 더욱 인상 깊어 보였을 것이다.

우향 박래현(1920~1976)은 1940년 일본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박래현은 1941년 ‘제2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부인상’으로 입선, 1943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단장’으로 총독상을 받으며 남다른 기량을 뽐냈다. 당시 일본에 거주했던 박래현은 총독상 수상을 위해 한국에 귀국했다가 김기창을 처음 만났다. 3년 뒤인 1947년 박래현은 김기창과 부부의 연을 맺었고, 작고하는 날까지 예술적 동지의 길을 함께 걸었다.

박래현 또한 초기에는 일본 화풍의 작품을 선보였으나, 1950년대 동양화의 재료와 서양화의 입체주의를 결합하여 동양화의 현대화를 시도한다. 1950년대 후반부터 여러 차례 해외 전시에 참여했던 박래현은 추상의 흐름을 접하며, 본격적으로 순수 추상의 세계에 들어선다.

박래현 '건어'(195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박래현 '건어'(195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에는 박래현의 추상 전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1950년대부터 60년대 작품이 출품됐다. 박래현의 작품 ‘건어’(1950년대)는 부부의 군산 피란 시절 그려진 작품으로 추측된다. 건어를 말리고 있는 노상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던 작가의 과도기적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고양이(情)’(1961)에서는 구체적인 형상이 드러나지만 입체파적 표현이 접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박래현은 1962년쯤 완전한 추상 작품을 제작한다. ‘작품Ⅰ’(1965)은 제목에서도 구체적인 형상과 내용을 걷어내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드러난다. 화면을 가득 메운 먹의 번짐과 자유로운 조형 정신을 탐구하며 선구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박래현 '작품 Ⅰ'(1965, 가나문화재단 소장).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박래현 '작품 Ⅰ'(1965, 가나문화재단 소장).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박래현은 1969년부터 1973년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판화라는 새로운 장르에서 또 다른 시작을 마주했다. 1976년 1월, 57세의 젊은 나이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도전과 실험을 멈추지 않았던 그의 예술세계는 더욱 심도 있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우향 박래현의 전시는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렸다. 전시 제목은 ‘삼중통역자’. 박래현은 김기창과 부부 동반으로 해외 전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적극적인 통역자 역할을 했다.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또 청각장애가 있는 남편을 위한 구어로 통역하는 자신을 스스로 ‘삼중통역자’로 일컬었다고 한다. 예술가이자 거장의 아내, 그리고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삼중통역사’의 삶을 살았던 박래현.

박래현은 당시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헌신적인 아내였으며 어머니의 역할도 훌륭히 수행했다. 하지만 개인으로서의 박래현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독창적 작품세계와 끝없는 탐구를 이어온 예술가 그 자체였다.

한편, 이건희컬렉션 한국 근현대미술 특별전 ‘수집: 위대한 여정’은 2023년 1월 29일까지 이어진다. 전시 예약은 부산시립미술관 홈페이지에서 가능하다.

김경미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정리=오금아 기자)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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