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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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7년 이탈리아 카노사 성문 앞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파문을 철회해 달라고 맨발로 무릎을 꿇은 채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호소하던 ‘카노사의 굴욕’은 중세시대 교황의 정치적·종교적 권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 베드로의 후계자로 불리는 교황은 근래에는 분쟁과 기아부터 도덕적 문제까지 지도하는 세계 지도자 역할을 맡고 있다. 교황은 회칙과 교서, 권고, 담화, 연설, 친서, 강론 등 다양한 형식을 통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늘의 사회, 윤리적 문제에 비추어 해석하고 적용하는 원리와 방안을 제시한다. 특히 회칙은 주교를 통해 배포하는 최고 권위의 공식 문서이다.

12월 31일 향년 95세로 선종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06년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첫 회칙을 통해 “사랑은 가능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체험하십시오”라고 강조했다. 13억 가톨릭 신자와 교회가 신앙의 핵심인 사랑으로 돌아가자는 호소였다. 후임자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 ‘두 교황’이란 넷플릭스 영화를 통해 ‘사랑과 내려놓음’이란 키워드로 세계인을 감동시켰던 그는 2009년에도 ‘진리 안의 사랑’이란 회칙을 내놓았다. “사랑하는 ‘너’를 향해 ‘네가 있어 좋다’라고 기뻐하고, 긍정하라. 사랑의 가장 기초적인 본질인 기쁨과 긍정은 모든 생각과 감정, 행동에 앞서기 때문”이라면서 자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거듭 촉구했다.

“더 이상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라면서 재위 기간에 물러났던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장례 미사가 오는 5일 열린다. 그는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 묘지에 안장되지만, 그가 걱정했던 죽음과 기아, 전쟁과 탐욕, 착취가 판치는 세상은 여전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북한 핵의 한반도 위협, 미·중 경쟁, 기후 재난과 난민, 빈부 격차, 코로나19 팬데믹 등 인류의 어려움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2023년이 시작됐다. “이웃은 자신이고 자신은 이웃이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사랑하는 세상이 되기를 빈다”는 그의 기도처럼 세상 모든 이가 서로를 사랑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름을 인정하고, 타협하고, 변화하면서 상대방에게서 기쁨과 사랑을 느끼는 것이 최우선이다. 우리 시대 평화의 사도이자 영적인 지도자였던 그가 주님의 품 안에서 영면하기를, 그의 기도가 이 땅에서 실현되기를 소망한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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