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만 찍은 민족 비극의 역사, 이젠 ‘마침표’를 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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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정전 70년 한신협 공동기획] 프롤로그
끝나지 않은 전쟁, 기억해야 할 미래

1129일 동안 300만 명 사망·실종
민간인 죽음·부상 등 99만 명 추산
마산만 전투·춘천대첩 기념관 건립
잊혀진 참상·유산 후세에 알릴 의무

지난해 11월 11일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에서 ‘턴 투워드 부산’ 국제추모식 후 참전용사 3인의 안장식이 열리고 있다. 부산일보DB 지난해 11월 11일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에서 ‘턴 투워드 부산’ 국제추모식 후 참전용사 3인의 안장식이 열리고 있다. 부산일보DB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 부산의 한 피란학교 아이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 부산의 한 피란학교 아이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한국전쟁 당시 식수를 받기 위해 줄을 선 부산 좌천동 피란민. 부산시 제공 한국전쟁 당시 식수를 받기 위해 줄을 선 부산 좌천동 피란민. 부산시 제공
한국전쟁 당시 주먹밥을 배식받는 제주 항만대 훈련소 입영 장병들. 향토 사학자 김웅철 씨 제공 한국전쟁 당시 주먹밥을 배식받는 제주 항만대 훈련소 입영 장병들. 향토 사학자 김웅철 씨 제공
한국전쟁 당시 마산 진동리전투에서 승리한 해병대 부대원들. 마산방어전투 기념사업회 제공 한국전쟁 당시 마산 진동리전투에서 승리한 해병대 부대원들. 마산방어전투 기념사업회 제공

한국지방신문협회는 올해 한국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끝나지 않은 전쟁, 기억해야 할 미래’를 주제로 공동기획을 진행한다. 〈부산일보〉 등 한신협 소속 9개 신문사가 함께 손을 맞잡고 오는 12월까지 2주에 한 차례씩 26회에 걸쳐 한국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되새긴다.


경기도 파주시 창동리 임진강 하구에서 동쪽을 향해 달려가면 일련 번호가 매겨진 팻말이 500~600m 간격으로 줄지어 있다.

‘0001호’로 시작하는 팻말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한반도를 가로질러 육지가 끝나고 바다를 만나는 강원도 고성군 명호리까지 248km 달려간 뒤에야 ‘1292호’로 마침표를 찍는다. 남쪽을 향한 696개와 북쪽을 향한 596개의 녹슨 표지판은 이곳이 남과 북을 가르는 ‘군사분계선’임을 알려 준다.

남과 북은 한반도의 동·서를 가로지른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DMZ)’를 사이에 두고 언제 재개될 지 모르는 ‘전쟁의 폭탄’을 품은 채 살얼음판을 걷듯 70년을 보내고 있다.

DMZ를 만들어 낸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했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이 체결되면서 중단됐다. 1129일 동안 300만 명의 사망자와 실종자를 낸 동족상잔의 비극은 남과 북을 갈라놓고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마침표(.)’가 아닌 ‘쉼표(,)’만 찍어 놓고 여전히 대치 중이다. 이렇게 70년을 맞은 정전의 시간, 그 물 밑으로는 어떤 역사가 흐르고 있을까.

지역 대표 언론 9개사가 소속된 한국지방신문협회는 한국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독자들과 함께 ‘끝나지 않은 전쟁’을 주제로 한국전쟁의 상흔을 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기억’의 공간으로 향한다.

그 첫 번째 여정은 ‘쉼표(,)’다. 한반도가 포성에 휩싸인 1950년 6월 25일부터 포성이 멈춘 1953년 7월 27일까지 수많은 젊은이가 자유를 지켜 내기 위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대한민국은 이들의 희생으로 자유를 지켜 낼 수 있었다.

한국전쟁 첫 승전 전투인 ‘춘천 대첩’,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필요한 시간을 벌어 준 ‘대전 전투’, 임시 수도 부산을 지켜 낸 ‘마산방어 전투’, 대한민국을 구해 낸 ‘낙동강 전투’, 한국전쟁의 분수령 ‘인천 상륙작전’, 그리고 정전을 앞두고 처절하게 치러진 최후의 전쟁 ‘백마고지 전투’까지….

박격포로도 달려오는 적의 전차를 막을 수 없게 되자 화염병과 폭약으로 적의 전차에 뛰어들어 파괴한 젊은 군인을 비롯해 “내가 물러나면 나를 쏴라”면서 부하들을 독려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사단장 등 전장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조국과 자유를 위해 희생한 영웅들의 숨소리를 찾아가는 길이다.

하지만 전쟁은 영웅들의 스토리만 만들어 내지 않는다. 누군가는 전장이 아닌 집에서, 마을에서 이유 없이 죽어가야만 했다. 왜 무참한 죽임을 당해야 했는지에 대해 가해자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한국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 알려지지 않은 그 피해는 상당했다. 그래서 두 번째 여정은 ‘물음표(?)’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과 부상, 실종은 99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중에는 북한군은 물론 국군과 유엔군의 무참한 학살로 끔찍한 죽음을 맞은 민간인도 많다.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불리는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이 대표적이다. 1950년 5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대전 동구 산내 골령골에서 벌어진 남북의 민간인 학살은 최소 1800여 명에서 최대 70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전남과 전북, 경남, 그리고 제주에서는 정부와 경찰이 죄 없는 민간인을 좌익으로 몰아 살해한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이 자행됐지만 희생자 수 등 진실 규명은 이뤄지지 않았다. 네이팜탄 폭격으로 인천 월미도 일대에서 희생된 100여 명의 마을 주민 역시 인천상륙작전의 기념비적 승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한국전쟁 이후 호남을 색깔 이데올로기로 물들게 한 ‘빨치산’의 역사와 아픔 등 숨겨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전쟁의 잔혹사를 찾아가는 여정은 1129일간의 전쟁보다도 더 아픈 여로가 될 듯하다.

세 번째 여정은 ‘말줄임표(…)’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이야기다.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고 기록해 우리가 이루지 못한 일을 후세에 연결시켜 주기 위한 길이기도 하다.

전 국토의 10%만 남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일명 ‘워커 라인’을 기점으로 한 낙동강 전투다. 이곳에서의 승리로 국군과 유엔군은 대반격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중요한 낙동강 전투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사실상 거의 없다. 낙동강 전투의 의미와 기념사업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1023일 동안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는 당시 임시수도 정부청사 등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재 동아대 소유인 임시수도 정부청사는 국가등록 문화재로 지정돼 관리 중이며, 세계 유일의 유엔묘지와 2022 부산비엔날레 무대로 활용됐던 부산항 제1부두 창고 등의 유산이 남아 있다.

세계전쟁사에 기록돼 있는 인천상륙작전을 오늘 다시 반추하고, 국립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전사들을 다시 떠올리며, 마산만 전투와 춘천대첩의 기념관을 세우기 위한 노력도 모두 후대에 역사로 전하기 위해서다.

아픔을 기억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아픈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가 똑같은 시련을 겪지 않도록 하는 것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짊어져야 할 또 다른 책무다. 한국전쟁의 아픈 상처를 기록으로 남기고 자유와 조국을 위해 이름 모를 산하에서 초개처럼 쓰러져 간 영웅들을 기리기 위한 움직임은 그래서 중요하다. 때문에 세 번째 여정의 또 다른 의미는 ‘현재 진행형(~ing)’이다.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평화의 댐 인근에는 백암산을 바라보며 철조망을 두른 언덕 안에 녹슨 철모를 쓴 10여 개의 ‘비목’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1964년 어느 날 백암산에서 수색대 소초장으로 근무하던 젊은 소위가 백암산 계곡에서 봤던 돌무덤과 이끼 낀 나무 비를 떠올리며 만든 가곡 ‘비목’의 탄생지다.

백암산은 1953년 6월부터 정전협정이 이뤄진 7월 사이에 벌어진 금성 전투의 핵심 전장이자 백암산을 사수하려는 국군 5사단과 8사단, 6사단 7연대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고지전을 벌이며 피로 지켜 낸 전장이다.

이곳에서 쓰러져 간 국군 장병들의 유해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습되지 못해 돌무덤 밑에 남겨졌거나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방치되기도 했다. 가곡 ‘비목’을 쓴 청년 장교 한명희 씨가 보았던 비목의 주인공도 백암산 전투에서 스러져 간 젊은 영웅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나라의 부름에 꽃 같은 젊음을 바친 비목의 주인이 꿈꿨던 모습은 어땠을까.

이름 모를 산하에 묻힌 선열들과 우리가 희망하는 정전의 쉼표(,)가 종전의 마침표(.)로, 그리고 끝내는 통일 한반도에 한민족의 기쁨과 환희로 물결치는 느낌표(!)가 가득 찬 모습을 기대하며 독자 여러분을 ‘기억’으로 향하는 여정에 초대한다.

강원일보=이명우 기자 woolee@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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