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새해 그리고 영산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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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민 종합건축사사무소 효원 대표

스케치 여행을 다녀오자는 동료의 말에 또 마음이 설렌다. 몇 해 전, 2박 3일의 건축 기행과 올 초에 가족여행을 하였음에도 안동 기행은 늘 가슴 두근거리게 한다. 선비 문화와 건축 유산이 섞여 있는 도시의 매력 때문일 것이다. 일정의 첫 순서를 봉정사로 잡았음은 물론이다. 오래전부터 내 마음의 안동 제 일경은 봉정사이다. 겨울 산을 향하는 마음이 바쁘다.

사찰을 기행하고 감격하는 것은 대체로 지금과 같은 때이다. 고즈넉하고 호젓한 느낌, 계절로는 만추의 가을이나 삭풍의 겨울 사찰이 인상 깊다. 봄 화엄사의 화려함이나 여름 송광사의 분주함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의 봉정사. 나는 지금 그걸 보러 왔나 보다.

마음속 ‘안동 제1경’ 봉정사

40대의 필자 고개 숙이게 한

만세루 등 경내 곳곳 복원 공사

건축가들 추앙하는 최고의 공간

영산암 마루에서 풍경 스케치

옛사람 솜씨에 단련되는 마음

이전에도 그랬는데, 오늘도 경내의 곳곳이 수리 중이다. 하지만 사찰의 완벽한 전경을 내 스케치북에 다 담지 못한다 하여 무엇이 문제가 될까? 복원 후의 말끔한 모습을 상상하며, 곳곳에 둘러쳐 있는 공사용 차단막 또한 아름답게 보기로 한다. 설령 복원이 원형에서 조금 빗나간들 어쩌랴. 사찰은 창건의 역사와 관계없이 엄연히 종교가 이루어지는 현세의 도량이니 현대적이고 실용적이어도 무방할 것이다.

한때 문화재를 대하는 나의 태도에 편견이 있었다. 폐허가 된 파르테논이나 피라미드의 장엄을 기대하듯 단청이 벗겨지고 솔이끼가 앉은 고전을 느끼려는 건축 문화적 욕심을 어쩌겠는가? 하지만 전통 사찰이 가지는 보존과 사용 사이의 혼돈과 고민을 이해하고부터 생각을 바꾸기로 하였다. 세월이 흐르니 사고의 독단도 허물어지나 보다. 이제는 그 변화마저 아름답게 보이니, 원형을 똑같이 보존해야 한다고 열을 올리던 시절이 아련하다.

40대의 나를 고개 숙이게 하였던 만세루 또한 복원 공사 중이다. 거기에 서서 들판의 노란색을 바라보던 때를 기억한다. 그것들은 익은 벼와 소국(小菊)의 물결이었다. 사찰을 등지고 인간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산의 골을 타고 올라오던 곡물과 거름의 냄새가 향긋한 차 향기와 다름없이 상쾌하다는 것을 알았다. 주변 마을의 농가 수익을 올려주는 소국이 결실의 들판에 가을빛을 더욱 보태고 있었으니, 그것이 곧 인간 세계의 향기이며, 어쩌면 극락정토의 궁극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세루 아래의 통로가 복원공사로 막히니, 요사채를 오른쪽으로 돌아 산을 더 오른다. 왼쪽의 경내는 뒤로 미루고 더 오르면 마침내 영산암. 뭇 건축가들로부터 우리나라 최고의 공간이라 추앙받는 곳이다. 마당을 가운데에 두고 ㅁ자 모양을 하고 앉은 건축이 마치 중부지방의 양반집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노송과 툇마루, 건물 모서리의 틈으로 보이는 산의 풍경. 뛰어난 건축가의 솜씨임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많은 건축가가 이곳의 공간감을 바탕으로 자신의 건물을 재창조하곤 하였다.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건축적 장소임이 분명하다.

영산암 마루에 한참을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이루지 못한 건축에의 열망, 내 가족의 소사. 스케치북을 꺼내어 잠시 마당과 나무의 풍경을 스케치하였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기웃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시간이 지나면 또 언제 여기에 올까? 뜬금없이 옛 스님들이 부러워진다.

늘 자신감으로 오르지만, 매번 수가 죽어 내려간다. 건축, 그림, 글. 오늘도 어느 것 하나 온전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내려가야 할까 보다. 하지만 훗날 다시 오르리라. 40대의 호기는 없어도, 능인, 의상과 같은 고승들의 체취와 빼어난 옛 건축가의 솜씨가 여전히 무지렁이인 나를 시험하고 단련시켜 주시니 나이가 무슨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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