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알라모에서 부산을 보다

윤여진 기자 onlype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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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진 사회부 차장

〈부산일보〉를 비롯한 한국지방신문협회 소속 신문사 9곳이 새해를 맞아 공동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전쟁 정전 70년을 맞아 ‘끝나지 않은 전쟁, 기억해야 할 미래’를 주제로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한 것이다.

근현대사의 질곡을 거치며 전쟁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잊힌 전쟁이 문화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질 기회를 얻었다.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 유산’이 지난해 말 5년 만에 ‘조건부’ 꼬리표를 떼고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덕분이다.

지난해 연수차 미국에 머물면서 방문했던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전교회’가 떠오른다. 샌안토니오 첫 전교회 알라모를 비롯해 샌안토니오강을 따라 조성된 5곳의 전교회를 아우른 이 유적은 신청서를 제출한 지 9년 만인 지난 2015년 세계 문화유산 등재에 성공했다. 이곳은 전쟁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스페인은 1724년 알라모를 세우고 원주민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 1821년 멕시코로 넘어갔던 이곳에서 텍사스는 독립을 위한 공성전을 벌였다. 결국 텍사스가 미국에 편입되면서 이전의 역사는 축소되거나 잊혔다. 하지만 1890년대 들어 지역 언론이 알라모에 주목했고, 시민단체가 토지 매입에 나서면서 보존과 복원의 길이 열렸다. 1977년엔 알라모 일대가 역사지구로 지정되면서 300년 역사가 오롯이 남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의 역사에서 새롭게 읽어낸 키워드 ‘교류와 공존’ 덕분이었다. “전쟁의 결과물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지역에 밴 삶과 문화에 접근했다”는 워싱턴대 지리학과 정진규 교수의 평처럼, 샌안토니오 전교회는 전쟁의 흔적에 머무르지 않고 풍성한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현장으로 변모했다. 미국 원주민과 스페인, 멕시코, 텍사스에 정착한 독일인 등이 한데 어우러진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라는 키워드는 샌안토니오를 바꿔나갔다. 주민들은 고스트 투어, 골목 산책, 리버 워크 크루즈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관광객들을 만났다. 샌안토니오는 전교회를 중심으로 인종과 문화를 초월한 인류애 공간으로 거듭나면서 미국 관광객들이 가장 가고 싶은 도시로 성장했다.

샌안토니오 전교회를 이처럼 상세히 풀어낸 까닭은 전쟁에서 삶을 읽어낸 피란수도 부산과 닮았기 때문이다. 피란수도 부산은 우리의 근현대사를 새롭게 조망하고 풀어낼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전쟁의 고통 속에서 전 국민을 껴안았던 포용의 도시, 나라의 관문 역할을 하며 외국 문화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 개방의 도시, 국가 산업화를 이끌며 발전의 촉매제 역할을 한 성장의 도시,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묘지를 안고 전세계에 화합을 호소하는 평화의 도시. 피란수도 부산 덕분에, 부산의 정체성은 보다 폭넓고 다채로워졌다. 이는 부산에서 2030 월드엑스포가 열려야 하는 이유와도 자연스럽게 맞닿는다.

유발 하라리가 “과거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듯, 70년간 ‘일시 중단’된 채 왜곡됐던 시간의 한 타래를 지금이라도 제대로 풀어낸다면 새로운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피란수도 부산에서 새 키워드를 찾아내고 기억해야 할 부산 나아가 우리나라의 미래를 여는 것, 지금 우리가 할 일이다.


윤여진 기자 onlype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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